스테이블코인이 가상자산 거래를 넘어 결제·정산 인프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카드사와 핀테크 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망을 잇따라 구축하면서, 국가 간 무역대금 정산이나 기업 간 송금에서 기존 은행 시스템을 보완하거나 일부 대체하려는 흐름이 뚜렷해지는 분위기다. 각국 정부도 발행자 요건과 준비자산(리저브) 관리 방식을 중심으로 규제 틀을 서둘러 다듬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핵심 강점은 ‘언제든’ 돈을 옮기고 정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러나 원화 같은 법정화폐 가치에 1대1로 연동되도록 설계된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주말·공휴일, 은행 영업시간과 무관하게 24시간 송금과 정산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글로벌 결제기업 스트라이프는 기업 간 거래에서 당사자 합의만 있으면 USDC 같은 스테이블코인으로 대금을 정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통적인 국제 송금은 여러 중개기관을 거치며 며칠이 걸릴 수 있지만, 스테이블코인은 네트워크 상에서 수분 내 처리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상용 사례도 확대되는 중이다. 비자는 12월 16일 미국 내 기관 파트너가 서클(Circle)의 USDC로 비자와 정산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혔다고 발표했다. 크로스리버은행과 리드은행이 초기 참여 은행으로, 솔라나(Solana) 블록체인을 통해 USDC 정산을 시작했다.
비자 측은 “은행 파트너들이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스테이블코인 정산을 확대한다”며 “기존 소비자 카드 경험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블록체인을 통해 더 빠른 자금 이동과 주말·공휴일을 포함해 매일 정산이 가능한 체계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비자는 스테이블코인 정산 규모와 관련해 월간 정산 규모를 연환산(annualized run rate)하면 35억달러 수준을 넘어섰다고 설명했다.
핀테크 업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스웨덴 핀테크 클라르나(Klarna)는 2025년 11월 25일 자체 스테이블코인 ‘클라르나USD(KlarnaUSD)’를 공개했다. 클라르나USD는 스트라이프 인프라를 기반으로 하며, 스트라이프와 암호화폐 투자사 패러다임이 함께 구축한 ‘템포(Tempo)’ 블록체인 위에서 발행·운영될 예정이다. 클라르나는 2026년 본격 출시를 예고했다.
클라르나는 "국경 간 결제가 연간 약 1200억달러의 거래 수수료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스테이블코인이 이 비용 구조를 낮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테이블코인이 결제 수단으로 확산되면서 각국 정부는 발행자 요건과 준비자산 관리 방식에 초점을 맞춘 규제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미국은 2025년 7월 18일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제정하며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연방 차원의 규제 틀을 세웠다. 이 법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게 현금이나 미국 국채 등 유동성 높은 자산으로 1대1 담보를 유지하도록 요구하고, 월별 준비자산 내역 공개 등 공시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의회 표결은 상원 68대 30, 하원 308대 122로 통과됐다.
유럽연합(EU)은 미카(MiCA) 규제를 통해 전자화폐토큰(EMT)과 자산준거토큰(ART) 체계를 적용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관련 핵심 규정은 2024년 6월 30일부터 시행됐다. 다만 EU 내부에서는 해외 발행자·역외 구조가 얽힌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추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홍콩은 5월 스테이블코인 법안을 통과시켜 법정통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 대한 라이선스 제도를 도입했다. 홍콩금융관리국(HKMA)은 준비자산 관리와 환매(상환) 절차를 핵심 요건으로 제시했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2023년 단일통화 스테이블코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확정했다. 일본에서는 2025년 3월 SBI VC 트레이드(SBI VC Trade)가 규제 승인 절차를 거쳐 USDC를 도입했다고 발표했다. 영국 영란은행(BoE)도 2025년 11월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 방향을 두고 협의 절차를 시작했다.
스테이블코인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금융 시스템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2025년 연차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커질수록 위기 때 국채 같은 안전자산까지 급히 팔아치우는 상황이 생겨 금융시장이 더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이 결제 자금의 ‘대기 장소’로 널리 쓰일 경우 은행 예금이 빠져나가 은행의 유동성과 대출 여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이 국경 간 결제의 사실상 표준이 되면, 일부 국가에서는 자국 통화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테더(Tether)의 파올로 아르도이노 CEO는 “USDT 성장은 신흥시장에서 달러 대체 수단으로 사용되는 흐름에 힘입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 이용자 입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은 크게 두 가지로 쓰인다. 첫째는 디지털 달러처럼 보유하는 방식이다. 환율이 크게 출렁이거나 물가가 빠르게 오르는 지역에서는 USDT 같은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이 실제 달러를 대신하는 수단처럼 쓰이는 사례가 보고된다.
둘째는 해외 송금이다.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거나 해외에서 번 돈을 옮길 때처럼 ‘국경을 넘는 돈’은 여전히 수수료 부담과 번거로운 절차가 문제로 꼽힌다. 글로벌 송금업체 머니그램(MoneyGram)은 USDC를 현금으로 바꾸거나, 현금을 USDC로 전환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블록체인 기반 송금이 ‘현금 수령’ 단계까지 이어지도록 연결해, 기존 해외 송금의 높은 수수료와 긴 처리 시간, 복잡한 중간 절차를 줄이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앞으로 관건은 스테이블코인이 얼마나 빠르게 제도권 금융 인프라 안으로 들어오느냐, 그리고 어떤 규율 아래 확산되느냐다.
다만 제도권 편입이 빨라질수록 규제 당국의 요구 수준도 높아질 전망이다. 영란은행이 시스템적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를 별도로 추진하는 것도, 대규모 지급결제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금융 안정성 위험을 관리하려는 목적이 크다. EU에서도 역외 발행 구조를 둘러싼 규제 수위를 놓고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이 얼마나 빠르게 확산되느냐 보다, 어떤 규율 아래에서 확산되는지가 더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