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잡지에서 라디오와 TV, 다시 인터넷의 등장과 스마트폰 시대에 이르기까지 자사 제품과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기업들의 고민은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마케팅’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이러한 기업들의 홍보활동은 특히 스마트폰 시대를 거쳐 디지털 전환(DX)이 기업들의 화두가 되며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됐다.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AI 기술의 발전과 함께 DX를 넘은 AX(AI 전환)에 대한 대응 필요성이 대두되며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어디까지나 B2C(일반 소비자 대상 비즈니스) 기업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치부돼 왔다. 마케팅 전략 논의에 있어서 B2B(기업 대상 비즈니스) 기업들의 무게추는 실질적인 매출을 일으키는 영업부서에 편중돼 온 것이 사실이다. 마케팅과 세일즈는 엄연히 다른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B2B 기업에게 마케팅은 세일즈와 동의어 혹은 세일즈 지원 역할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그간 소외돼 왔던 B2B 기업의 마케팅과 캠페인 전략 필요성을 언급한 두 권의 책 ‘하룻밤에 읽는 B2B 마케팅’ ‘하룻밤에 읽는 B2B 캠페인’이 업계에 이목을 집중시키며 화제가 되고 있다. 저자는 27세, 업계 최연소로 IT 전문 PR 기업을 창업한 정민아 앨리슨하이퍼앰 대표다.
지난 2002년 IT 전문 PR 기업 민커뮤니케이션(현 앨리슨코리아)를 설립한 정 대표는 이후 23년 내리 한국과 글로벌 기업을 연결하는 B2B 마케팅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해왔다. 설립 후 현재까지 앨리슨코리아는 글로벌 ERP 기업들과 15년간 협력하며 글로벌 최고 수준의 기준을 경험했고, 마이크로소프트, 세일즈포스, AWS, 엔비디아, 다쏘시스템, 인텔, 코닝, 삼성전자 반도체, 현대자동차 수소 상용화 프로젝트 등 글로벌 테크 기업 500여 곳과 협업해왔다. 그렇게 쌓은 경험과 노하우는 정 대표를 실리콘밸리 및 유럽, 중국의 테크 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할 때 가장 먼저 찾는 '현지화 전문가'로 만들었다.
그 와중에 정 대표는 한국 중견·중소기업의 글로벌 진출 지원에 관심을 두고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제19대, 제20대 한국PR기업협회 회장을 연임하며 업계를 이끌기도 했다. 글로벌 진출에 나서고자 하는 B2B 기업을 위한 마케팅 컨설팅과 교육을 진행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서비스 브랜드가 하이퍼앰이다.
정 대표는 오는 12월 9일 개최되는 ‘디지털 마케팅 인사이트 2026’에서 오랜 파트너십을 이어온 글로벌 기업들의 마케팅 책임자들과 함께 ‘불황에도 빛나는 B2B 마케팅 전략 : AX로 찾는 성장 동력’을 주제로 한 발표와 패널 토론을 앞두고 있다. 과연 정 대표가 이야기할 B2B 마케팅의 새로운 전략은 무엇일까? 커리어 전반을 통해 정 대표가 확보한 인사이트를 들어봤다.
B2B 기업에게 마케팅이 프로세스가 되지 못한 이유

“대부분의 한국기업은 대기업이 요청하는 용역을 제공하는 하청기업이다. 강력한 고객이 있기에 생존에 대한 불안이 상대적으로 적기도 하고, 고객의 눈치를 봐서 용역 회사인 자기 회사를 자신 있게 드러내지도 않는다. 현재 고객의 까다로운 요구를 맞춰주는 것만으로도 어려운 일이기에 또 다른 시장으로 눈 돌릴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자사의 비즈니스 운명이 상당 부분 고객의 결정에 좌지우지된다.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고객사의 의사결정에 맞춰 비즈니스의 성장과 하락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하룻밤에 읽는 B2B 마케팅 中
정민아 대표의 20대는 여느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홍보 대행사에 취직해 열정적으로 일했다. 남다른 책임감과 능력을 발휘하는 그녀를 지켜본 고객사는 창업을 권했고, 그렇게 용기를 얻어 27세에 호기롭게 IT 전문 PR 회사를 창업했다. 창업 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 대표는 자신의 책에서 지적한, 용역 문화에 사로잡힌 한국 B2B 기업의 문제에서 그 스스로 자유롭지 않다는 고백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나름 일을 잘 했어요(웃음). 몇 년 경력이 쌓이면서 유명 IT 기업의 인하우스 마케터로 이직을 고민하고 있던 차였죠. 그때 저를 좋게 평가하던 고객사 쪽에서 창업을 하는 것이 제게 더 어울린다고 하더군요. 마침 IT 붐이 일던 시기이기도 했고, 오퍼가 굉장히 많던 시기라 결심을 했죠. 어떻게 보면 제 책에서 마치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언급한 한국 기업의 용역 문제는 사실 제 이야기이기도 한 셈이에요.”
그렇게 23년여, 현재 정 대표가 운영하는 앨리슨과 하이퍼앰 두 브랜드는 명확한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 앨리슨코리아는 PR, 디지털 마케팅 등 실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다. 리드 개발(Lead Generation, 구매의사가 있는 잠재고객 발굴)과 디맨드 제너레이션(Demand Generation, 새로운 수요 창출) 같은 실행 영역을 담당한다. 반면 하이퍼앰은 마케팅 컨설팅과 교육에 집중한다. 브랜드 컨설팅, CRM 컨설팅 등 전략적 영역을 다룬다. 특히 하이퍼앰은 비교적 최근에 설립된 회사로, 책 출간 시기와 맞물려 만들어졌다. 한국 B2B 기업들에게도 마케팅의 필요성과 노하우를 전파하기 위한 정 대표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책을 쓰게 된 이유 자체가 한국 B2B 기업을 위해서였어요. 코로나19 팬데믹 무렵 한국 B2B 기업들로부터 마케팅 컨설팅과 교육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때까지 그들에게 해외 컨퍼런스에 나가 홍보하는 것이 유일한 마케팅 활동이었는데, 그게 다 막혀 버린 상황이 된 거예요. 그때 컨설팅을 진행하며 굉장히 놀랐어요. 설마 했는데 정말 마케팅과 관련된 조직이나 개념이 정립돼 있지 않았어요. 그때 다시금 한국 기업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알게 됐죠.”

그에 앞서 정 대표가 한국과 글로벌 기업의 차이를 극명하게 인식한 것은 2014년경이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3곳과 동시에 계약을 맺었는데, 그중 한 회사가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계약 당시에는 그 회사는 불과 몇 명에 불과했고 회사 규모도 앨리슨코리아가 더 클 정도였다고. 하지만 그런 상황은 몇 년 만에 역전되며 해당 기업은 엄청나게 빠른 성장을 이뤄냈다. 정 대표가 말한 차이는 VC(벤처캐피탈)의 역할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스타트업이나 초기 기업은 VC가 조직을 만들어줘요. 특히 마케팅의 경우 VC가 투자하면서 팀 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를 제공하죠. 콘텐츠 마케터 몇 명, 디지털 마케터 몇 명을 채용하라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지침을 줘요. 다시 말해 마케팅이 프로세스로 자리잡고 있는 거예요. 마케팅이라는 업무 자체가 필수 프로세스로 정립돼 있는 거죠. 이를테면, 재무팀과 같은 거예요. 보통 회사가 어느 정도 세팅이 되면 재무팀을 만들잖아요. 그 재무팀을 두고 '돈을 못 버네, 재무팀 없애라' 그러지 않잖아요. 마케팅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는 예산이 부족하거나 상황이 안 좋으면 마케팅 조직부터 없애거나 축소하죠.”
정 대표가 본 해외 기업들은 달랐다. 광고나 캠페인 같은 큰 비용이 드는 활동은 줄이더라도 기본적인 마케팅 활동은 계속한다. 즉 마케팅은 회사 운영에 필수적인 기본 활동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또 정 대표는 “세일즈포스를 사용하며 CRM 캠페인을 진행하는 모습, 체계적으로 데이터를 관리하는 방식 등이 인상적이었다”고 돌이켰다. 그 시절, 한국에서 세일즈포스를 쓰는 기업은 전무했다고.
"어떻게 보면 그런 방식이 느린 것 같지만 안정적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반면 우리나라 기업들을 보면 사업 진행은 빠르게 되는데, 어느 순간 훅 망해버리는 경우가 생기더군요. 기본이 되는 요소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탓이 큰 것 같아요.”
B2B 기업이 용역업체를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정 대표는 “1권인 ‘하룻밤에 읽는 B2B 마케팅’ 이후 1년만에 후속작을 발표한 것은 책 출간 후 예상을 뛰어 넘는 업계의 반응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특히 지방 스타트업들로부터 링크드인을 통해 많은 연락을 받았다.
부산에 있는 한 스타트업 대표는 "회사에 선배도 없고 마케팅을 하는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마케팅을 해야 되는데 이 책이 없었으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털어 놓기도 했다. 대전 등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고.
앞서 언급됐지만, 정 대표가 첫 책에서 가장 강하게 지적한 문제는 '용역화'다. 우리나라가 마케팅이 없는 이유는 대부분이 ‘형님 회사’ 밑에서 일하는 ‘용역 회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 대표의 분석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B2B 중견기업 대부분이 대기업의 1차, 2차, 3차 벤더로 존재하는 상황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 대표는 실제 컨설팅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모 대기업의 1차 벤더인 한 중견기업을 컨설팅했을 때의 일이다.
"이 회사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어요. 이 회사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은 형님 기업인 대기업의 SCM(공급망 관리) 담당자였죠. 내년에 이 회사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어느 나라에 진출하게 될지, 어떤 회사를 인수해야 할지 등 모든 것이 대기업의 SCM 플랜에 따라 결정됐어요. 조 단위 매출을 내는 중견기업들이 그냥 ‘형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해 왔던 거예요.”

정 대표는 “이런 구조에서는 발주 기업인 대기업이 단가 인하를 요구할 때 협의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대기업들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개척해 놓은 상황에서 시키는 것만 하게 되는 용역 회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정 대표의 말에 따르면 이는 매출 구조는 좋을지 몰라도 건강한 비즈니스 구조는 아니다. 그렇다면 탈출구는 무엇일까. 정 대표는 해외 마케팅을 제시한다.
"내 비즈니스의 운명은 내가 개척을 해야 돼요. 하지만 지금 국내 상황에서는 변화를 주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해외 마케팅을 통한 새로운 고객 확보가 필요해요. 해외 시장에는 '형님'이 없어요. 홀로 서기를 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비즈니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정 대표는 “해외 마케팅에서는 브랜딩이 핵심”이라고 조언했다. 국내에서 아무리 좋은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는 기업이라도 해외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일 뿐이다. 정 대표는 컨설팅에서 브랜딩을 강조하고, 해당 제품이나 서비스가 왜 필요한지를 시장에 알리는 역할에 집중한다. 또한 외국 시장의 경쟁사들과 어떻게 포지셔닝을 가져갈 것인지도 중요한 컨설팅 영역이다.
하이퍼앰의 주요 고객층은 중견·중소기업이다. 대기업은 이미 마케팅 조직과 프로세스가 갖춰져 있는 반면, 중견·중소기업은 대부분 아무런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연락 오는 기업들은 “정 대표의 책을 읽고 웹사이트도 만들고 링크드인도 오픈했다”면서도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토로한다고.
정 대표는 “띄엄띄엄 활동하는 것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며 “회사 내에 전문가가 없다 보니 이런 갈증이 생기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AI 시대, 마케터의 목표는 CMO가 아닌 CRO가 돼야
마케팅 프로세스를 갖추려 노력하는 기업들이 답답해하는 부분을 정 대표는 두 번째 책인 ‘하룻밤에 읽는 B2B 캠페인’에 담았다. 첫 책이 전략과 필요성을 강조했다면 두 번째 책은 실전 매뉴얼이라 할 수 있다. 정 대표는 “컨설팅을 현실에서 적용하려면 실제 업무 역량이 있는 마케터가 필요하다”며 “누구나 매뉴얼만 있으면 실행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두 번째 책을 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책의 핵심 메시지도 차이가 있다. 1권에서는 영업만큼이나 마케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고, 2권에서는 마케팅의 존재 이유 역시 매출 창출과 기업 성장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는 영업 중심의 조직 운영을 하는 B2B 기업의 문제를 지적할 뿐 아니라 매출은 외면하는 마케팅 조직의 문제까지 동시에 꼬집은 말이기도 하다. 정 대표는 "마케터가 아무리 데이터를 잘 분석하고 창의적이어도 기업 매출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라며 두 번째 책의 부제를 언급했다.
“이번 책의 부제는 'AI 시대, 마케터에서 CRO로 도약하는 실전 가이드'예요. CMO(Chief Marketing Officer, 최고 마케팅 책임자)가 아닌 CRO(Chief Revenue Officer, 최고매출책임자)라고 한 이유는 마케팅이 더 이상 한 부서의 기능이 아니라 전사적 수익 창출 시스템의 설계자가 돼야 하기 때문이죠. CMO가 CRO로 진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타이틀 변경이 아니라 마케팅-영업-고객성공을 관통하는 전체 수익 엔진을 책임진다는 의미예요."
그러면서 정 대표는 마케팅 조직이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로 '변화에 대한 대응'을 꼽았다. AI 시대로 접어들며 많은 기업 대표들이 대응 방안을 고심하지만 중요한 것은 특정 도구나 기술이 아니라 조직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정 대표는 다시금 “마케팅 조직은 변화를 감지하고, 대응하고, 내재화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며 말을 이어갔다.

“마케팅 조직 구축에서 가장 시급한 3가지 체크리스트가 있어요. 우선 첫째는 ‘우리는 시장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가’를 따져봐야죠. 마케팅 조직이 고객의 목소리를 듣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경쟁사와 기술 트렌드를 모니터링하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CEO가 아침 뉴스로 업계 트렌드를 파악한다면 이미 늦은 겁니다. 둘째는 ‘시장의 변화에 대응할 힘이 있는가’예요. 변화를 감지해도 대응할 자원과 권한이 없다면 무용지물이죠. 마케팅 팀에는 적정 예산(매출의 최소 5% 이상), 의사결정 권한(CEO 직속 보고), 실행 역량(AI 도구 활용, 콘텐츠 제작, 캠페인 실행)이 필요해요. 많은 한국 기업들이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마케팅 조직에는 1~2명과 얼마 안 되는 예산만 배정하는 것이 현실이죠.”
정 대표가 강조하는 세 번째 체크리스트는 ‘변화를 내부에 정착시킬 역량이 있는가’이다. 마케팅이 아무리 좋은 인사이트를 가져와도 조직 문화가 경직되어 있거나 다른 부서와 협업이 안 되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마케팅은 각 팀을 이끌고 전사적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위상과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정 대표가 CMO에서 CRO로의 진화를 강조하는 이유다.
새로운 도구의 도입은 내부반발 당연…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닌 실행과 전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B2B 기업 그 중에서도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어려움을 토로한다. 대기업 고객들의 경우 예외 없이 커스터마이징(맞춤 제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매출 등의 실적이 필요한 스타트업, 중소기업의 경우 그런 요구가 SaaS의 본질과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커스터마이징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커스터마이징 요구는 옵션 상품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해요. 전 세계에서 한국 사람들만 커스터마이징 해 달라고 그럽니다. 10여년이 넘게 글로벌 ERP 기업을 홍보하면서 수많은 한국 기업의 ERP(전사적자원관리) 구축 사례를 경험했어요.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대한민국에서 ERP 도입하고 만족하는 기업은 단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이죠. 문제의 본질은 한국 기업들의 잘못된 접근법에 있어요. 월가가 보는 재무 구조에 우리 회사를 맞추는 게 ERP예요. 하지만 멀쩡한 글로벌 스탠다드 ERP를 갖고 와서 특정 기업에 맞게끔 커스터마이징을 한다는 것은 맞지 않죠. 안 해야 될 커스터마이징 프로젝트 하니 직원들만 힘들고 결국은 아무 의미 없는 결과만 나옵니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회사를 맞춰야 하는데, 거꾸로 시스템을 회사에 맞추려고 한 결과죠”

그러면서 정 대표는 “회사가 체질 개선을 하려고 애플리케이션을 도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용자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결국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은 내부 반발을 불러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정 대표는 “DX나 AX가 바로 그런 과정”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회사 전체의 일하는 프로세스를 바꿔야 하는 앱은 100% 불편합니다. 대부분의 솔루션이나 앱이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게 정상이고 불편하지 않으면 의심해야 돼요. 도입 초기 불편하다고 해서 편하게 바꿔주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렇게 되면 DX나 AX는 무의미해지고 결국 기존 방식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정 대표에 따르면 CRM(고객관리) 솔루션이나 AI 도입에서 실패하는 기업들의 공통점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면서 정 대표는 도구에 대한 맹신을 경계하기도 했다. ‘좋은 골프채를 사면 골프 실력이 좋아질 수 있다’ ‘등산을 하려면 등산복과 등산화 등 장비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식의 판단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CRM만 구축하면 그 안에서 데이터가 나올 줄 아는 기업 책임자들이 있어요. 마케팅 캠페인을 해야 데이터가 생기는데, 무턱대고 도구부터 도입하는 거죠. AI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예요. 실행도 안하고 데이터도 없는 상황에서 도구만 도입하면 아무 의미가 없죠. AI는 도구입니다. 이 새로운 툴을 자연스럽게 마케팅이라는 프로세스 안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요. AI를 활용해 콘텐츠를 만들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등 훌륭한 팀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죠. 그러면서 마케터들은 더 전략적인 일을 할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핵심은 ‘우리에게 AI를 활용해 시도할 수 있는 전략이 있는가’ 입니다."
B2B 마케팅에서 일어날 세 가지 전환
AI 전환과 함께 최근 화두가 된 AEO(Answer Engine Optimization)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명확한 시각을 제시했다. 초개인화 시대에 기업의 마케팅은 그에 맞는 전략과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뉴스를 바로 보지 않아요. 대신 내가 필요할 때 AI한테 맞춤형 요약을 요구하죠. 결국 뉴스를 모두 살펴보는 것은 AI예요. 이러한 상황에서 AEO가 잘 되려면 수시로 웹사이트를 업데이트하고 보도자료를 정기적으로 배포하는 등 정말 열심히 활동해야 AI도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정 대표는 향후 B2B 마케팅에서 일어날 세 가지 전환을 예측했다. 첫 번째는 'From Buyer to AI Agent'다. 당장 2026년부터는 B2B 구매 의사결정의 상당 부분을 AI 에이전트가 담당하게 된다. 가트너는 올해까지 B2B 구매 의사결정의 80%가 AI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정 대표는 "이제 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AI를 설득해야 한다"며 “SEO가 AEO로 진화하는 것은 시작일 뿐, 우리의 제품 정보, 고객 사례, 기술 문서를 AI가 이해하고 추천할 수 있는 형태로 구조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말하는 두 번째 전환은 'From Marketing Department to Revenue Architecture'다. 마케팅은 더 이상 한 부서의 기능이 아니라 전사적 수익 창출 시스템의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CMO가 CRO로 진화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이는 단순한 타이틀 변경이 아니라, 마케팅-영업-고객성공을 관통하는 전체 수익 엔진을 책임진다는 의미다.

세 번째 전환은 'From Korean Market to Global-First Mindset'다. 정 대표는 AI 시대에 접어들며 중소기업도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타깃 할 수 있다는 변화에 주목했다. 웹사이트 하나로 전 세계 구매자에게 발견될 수 있고, AI 번역으로 언어 장벽도 낮아졌다. 한국 B2B 기업들이 '한국 시장 먼저, 나중에 해외'가 아니라 처음부터 'Global-First'로 사고해야 하는 이유다. 인터뷰 말미, 정 대표가 B2B 기업 CEO와 마케터들에게 전하는 당부는 적잖은 무게로 다가온다.
"마케팅은 기업 생존을 위한 필수 영양소입니다. 없으면 하루 이틀은 괜찮은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CEO는 마케팅이 하나의 필수 프로세스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하고, 마케터는 마케팅의 존재 이유가 고객 창출, 시장 창출이라는 생각으로 회사의 내일을 책임져야 합니다. 모두 무거운 책임감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한편 정민아 대표의 보다 구체적인 인사이트는 오는 12월 9일 서울 역삼동 GS타워 ‘아모리스홀’에서 개최되는 ‘디지털 마케팅 인사이트 2026’ 무대에서 ‘불황에도 빛나는 B2B 마케팅 전략 : AX로 찾는 성장 동력’ 주제 발표와 패널토론으로 소개된다.
패널토론에는 오랜 기간 앨리슨코리아에 신뢰를 보내온 글로벌 빅테크 AWS를 비롯해 세일즈포스, 다쏘시스템 등 B2B 기업 마케팅 책임자들이 함께한다. 용역 구조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고 싶은 B2B 기업, 마케터들에게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