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오랜 기간 이어져 온 ‘현금 사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핀테크 스타트업 JPYC가 세계 최초로 엔화 가치에 완전히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서다. 이 코인은 전통적인 지불 수단이 지배하던 일본 금융 생태계에 디지털화의 첫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JPYC는 지난 27일부터 엔화와 1대1 비율로 고정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고 밝혔다. 회사는 발행된 코인이 일본 내 예금과 일본국채(JGB)로 100% 담보된다고 전했다. 이는 단순한 암호화폐 프로젝트가 아닌, '일본 금융청(FSA)'의 인가를 받은 제도권 디지털 화폐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에 JPYC 대표 오카베 노리타카는 “엔화의 신뢰를 그대로 옮긴 디지털 화폐”라며 “전통 금융과 블록체인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현금의 나라, 조용한 전환의 시작
일본은 여전히 ‘현금의 나라’다.
지불의 40% 이상이 지폐나 동전으로 이뤄지고, 카드나 전자결제 비율은 OECD 국가 중 하위권이다. 정부가 수년째 ‘캐시리스 경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국민적 신뢰 부족과 높은 보안 우려로 속도는 더디다.
그런 일본에서 JPYC의 등장은 상징적이다. 이는 ‘국가 승인’을 받은 첫 디지털 결제 토큰으로, 실제 화폐와 교환 가능한 디지털 엔화가 탄생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JPYC는 “이 코인은 언제든지 1 JPYC = 1 엔으로 교환 가능하며, 이용자 자산은 일본 내 은행에 안전하게 예치된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스테이블코인은 일본 내 합법적 결제 수단으로 인정받는 첫 사례가 됐다.
■ 정부가 허가한 ‘디지털 엔화’, 제도권으로 들어오다
먼저, JPYC는 일본 자금결제법(資金決済法)의 개정을 바탕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전자결제수단’으로 등록했다.
기존의 암호화폐가 투기적 자산으로 분류되던 것과 달리, JPYC는 명확히 금융청 관리 아래 놓인다. 또한, 현금과 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받지 않지만, 송금·거래·온라인 결제 등에서 합법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JPYC는 “발행량과 담보 자산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며 신뢰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담보 자산은 일본 국내 은행 계좌와 국채로 구성되며, 회계감사를 정기적으로 받는다. 이는 스테이블코인 붕괴 사태를 경험한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 회복의 중요한 모델로 평가된다.
■ ‘메가뱅크’도 움직인다
JPYC의 등장은 일본 전통 금융권에도 충격을 줬다.
'닛케이 신문'는 일본의 3대 메가뱅크인 미쓰비시UFJ, 미즈호, 미쓰이스미토모가 공동으로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들 은행은 블록체인 기반 결제망 ‘프로젝트 가디언(Project Guardian)’을 통해 디지털 자산 전환 실험을 진행 중이며, JPYC의 성공이 향후 민간·은행 간 협력 구조를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일본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실험과도 맞물린다. JPYC가 ‘민간형 디지털 엔화’라면, 일본은행(BOJ)이 추진 중인 CBDC는 ‘공공형 디지털 엔화’다. 두 모델이 향후 결제 인프라 안에서 결합할 경우, 일본은 세계 최초의 복합형 디지털 통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 수익모델은 ‘국채 이자’…JPYC의 실험
JPYC는 코인 거래 수수료를 부과하지 않는다.
대신 담보로 보유한 일본국채(JGB)의 이자 수익을 주요 재원으로 삼는다. 즉, JPYC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통해 안정적 이자 수익을 창출하는 ‘핀테크형 미니 은행 모델’을 실험하는 셈이다.
이에 JPYC는 3년 안에 최대 1조 엔 규모의 코인을 발행하고, 이를 전자상거래·게임·해외송금 등 다양한 디지털 경제 영역에 확산시킨다는 계획이다.
■ 한국, 디지털 원화 실험으로 응답하다
이제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보자.
JPYC의 성공적 출범은 한국 금융당국과 한국은행에도 명확한 자극이 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이미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실험을 본격화했다. 2024년 말부터 도매형 CBDC 모의실험을 시작했고, 2026년 상반기에는 민간은행·IT기업과 함께 유통 단계 테스트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른바 ‘디지털 원화’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CBDC는 단순한 전자화폐가 아니라, 금융 인프라의 근본 구조를 바꾸는 기술”이라며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과 공공 지출의 효율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JPYC 이후, 한국의 민간형 코인 논의 급물살
흥미롭게도, JPYC의 등장 이후 한국 정부는 민간 스테이블코인 규제 방향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법정화폐 연동 스테이블코인의 국내 발행 가능성”을 공식 검토하고 있으며, 담보자산의 투명성과 발행주체의 책임성을 조건으로 한 허용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카카오 계열사 크러스트유니버스 (Krust Universe Pte. Ltd.),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 신한은행 등은 이미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JPYC는 하나의 신호탄”이라며 “한국도 머지않아 법적으로 인정받는 ‘디지털 원화 토큰’이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아시아, ‘디지털 통화’ 주도권 경쟁 돌입
일본의 JPYC, 한국의 CBDC 실험,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e-CNY), 싱가포르의 규제형 스테이블코인… 아시아는 지금 디지털 화폐 경쟁의 중심에 있다.
중국은 이미 260개 도시에서 중국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법정화폐(CBDC)인 'e-CNY'를 실험하며 누적 거래액 2조 위안을 돌파했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은행 연합을 통한 국경 간 결제 실험에 착수했다. 이 가운데 일본은 ‘민간형 법제화 모델’, 한국은 ‘공공형 중앙은행 모델’이라는 서로 다른 접근법으로 디지털 화폐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변화 속도는 일본보다 빠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5년 현재 현금 결제 비중은 전체의 10% 미만, 비현금 결제 비율은 90%를 넘었다. 특히 2030세대는 간편결제, QR코드 송금, 암호화폐 거래 등 디지털 금융에 익숙하며, 이미 ‘현금 없는 생활’을 실현하고 있다.
이는 JPYC가 일본에서 맞닥뜨릴 보수적 소비자 장벽보다 훨씬 낮은 진입장벽을 의미한다. 한국은 기술적·문화적으로 이미 디지털 화폐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난 사회다.
■ 엔화와 원화, 같은 목표를 향해
결국 JPYC의 디지털 엔화와 한국은행의 디지털 원화는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하나는 민간이, 하나는 중앙은행이 주도하지만 목표는 같다.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자국 통화의 신뢰 유지."
엔화가 디지털 시대의 첫 발을 내딛었다면, 원화는 그것을 뒤따르며 제도적 완성도를 더해 가고 있다. 이 두 나라의 움직임은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니라, 통화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혁신은 언제나 조용히 시작된다. 그리고 그 파장은 금융의 심장부를 흔들며, 새로운 시대의 화폐 질서를 만들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