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9일, 메타가 퀘스트 가격표를 갈아 끼웠다. 퀘스트3 512GB는 500달러에서 600달러로, 퀘스트3S 두 모델은 각각 50달러씩 올랐다. 회사가 내놓은 이유는 단 한 줄이었다. "고성능 VR 하드웨어를 만드는 비용이 크게 올랐다. 특히 메모리 칩 값이 그렇다." 시장의 4분의 3을 쥔 회사가 주력 제품 가격을 처음으로 밀어 올린 이날의 결정은, 이후 반년 동안 벌어진 일을 미리 요약해 놓은 셈이었다.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9월 8일, 카운터포인트리서치(Counterpoint Research)가 분기 집계를 갱신했다. 2026년 2분기 전 세계 VR 헤드셋 출하량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18%, 직전 분기보다 16% 줄었다. 같은 분기 AR 기기 출하량은 138% 늘었다. 조사기관은 감소 원인의 하나로 "세계 메모리 가격 급등 속에 메타가 VR 헤드셋 가격을 올린 결정이 이미 식어가던 시장에 부담을 더했다"고 적었다.
더 극단적인 숫자도 있다. 스마트 애널리틱스 글로벌(Smart Analytics Global)은 8월 18일 자료에서 같은 2분기 VR 헤드셋 출하량이 전년 대비 79% 급감한 반면 AI 스마트 안경은 776% 폭증했다고 밝혔다. 조사기관마다 잣대가 달라 낙폭은 18%에서 79%까지 벌어지지만, 화살표의 방향만큼은 어긋나지 않는다. VR은 내려가고 안경은 올라간다.
12년, 800억 달러, 그리고 방향 전환
업계의 최대 후원자가 보낸 신호는 숫자보다 분명했다. 메타의 리얼리티랩스(Reality Labs)는 2026년 1분기 매출 4억200만 달러에 영업손실 40억2,800만 달러를 냈다. 시장 전망(약 48억 달러 손실)보다는 나았지만, 매출의 100배에 가까운 돈을 태우는 구조는 그대로다. 2020년 말 이후 이 부문이 쌓은 누적 영업손실은 8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번에 달라진 건 말투였다. 최고재무책임자(CFO) 수잔 리(Susan Li)는 실적 발표에서 2026년 손실이 2025년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면서도, VR 투자만큼은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재작년까지 회사가 스스로 '차세대 컴퓨팅 플랫폼'이라 부르던 사업에 붙은 단서였다.
행동은 발표보다 빨랐다. 올해 1월 메타는 리얼리티랩스 인력의 약 10%, 1,000명 안팎을 내보냈고, 감원은 퀘스트 소프트웨어와 호라이즌 월즈(Horizon Worlds) 쪽에 집중됐다. 차기 로드맵도 뒤집혔다. 업로드VR 등이 보도한 재편안에 따르면 메타는 초경량 헤드셋을 2027년 상반기에 내놓고, 정통 후속작인 퀘스트4는 그 뒤로 미루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다고 메타가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다. 최고기술책임자(CTO) 앤드루 보스워스(Andrew Bosworth)는 "우리는 이 공간에 계속 상당히 투자하고 있다. 다만 VR이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투자 규모를 적정선에 맞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메타는 2025년 VR 개발자 프로그램에 1억5,000만 달러 가까이 썼고, 구독 서비스 메타 호라이즌+(Meta Horizon+)는 가입자 100만 명을 넘겼다. 메타가 접은 것은 VR 자체가 아니라, VR을 스마트폰 자리에 올려놓으려던 승부수다.
애플은 3년 만에, 조용히 손을 뗐다
두 번째 축은 애플이다. 미국 IT 전문 매체 맥루머스(MacRumors)가 올해 5월 전한 바에 따르면 애플은 부진한 판매와 높은 반품률을 이유로 비전 프로(Vision Pro) 후속 개발을 중단했다. 2024년 2월 3,499달러에 등장한 이 기기는 첫해 39만 대 안팎을 파는 데 그쳤고, IDC는 지난해 4분기(홀리데이 시즌) 출하량을 약 4만5,000대로 내다봤다. 스마트폰 한 세대가 반나절에 소화하는 물량이다. 반품률은 애플 제품 가운데 가장 높았다는 얘기가 나왔고, 디지털 광고비는 95% 이상 잘린 것으로 전해졌다.

더 상징적인 건 가격이었다. 애플은 6월 25일 비전 프로 기본형을 3,499달러에서 3,699달러로, 512GB와 1TB 모델을 각각 3,899달러, 4,199달러로 올렸다. 세 모델 모두 200달러 인상이다. 팀 쿡(Tim Cook) 최고경영자는 일주일 전 메모리와 저장장치 값 폭등 때문에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밝힌 참이었다. 애플은 같은 날 아이폰과 에어팟은 그대로 두고 맥과 아이패드, 홈팟, 비전 프로만 올렸다. 대중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제품, 곧 소비재가 아니라 파일럿 훈련·제품 설계 검토·수술 교육에 쓰이는 기업용 장비로 이 제품을 재정의한 셈이다.
차세대 비전 프로는 최소 2028년 이후로 밀렸고, 가격을 절반 낮춘 '비전 에어(Vision Air)'는 로드맵에서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 애플의 무게추도 경량 안경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헤드셋이 죽은 게 아니라, 무게추가 옮겨간 것
여기까지만 보면 '몰락'처럼 읽힌다. 그런데 시장을 뜯어보면 그림이 한 겹 더 있다. IDC는 2025년 혼합현실(MR)·VR 헤드셋 출하량이 42.8% 줄어 390만 대에 그친 반면, 나머지 XR(디스플레이가 있든 없든 AI 안경)는 211.2% 늘어 1,060만 대를 기록할 것으로 봤다. 그러면서 2026년을 "헤드셋 시장 반등의 출발점"으로 규정했다. VR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성장 엔진이 안경으로 넘어간 것이다.
헤드셋 진영의 생존 신호도 있었다. 밸브(Valve)는 9월 14일 아무 예고 없이 무선 독립형 헤드셋 스팀 프레임(Steam Frame)을 내놨다. 퀄컴 스냅드래곤 8 3세대 칩에 16GB 메모리, 눈당 2160×2160 액정(LCD) 패널을 얹고 256GB 1,059달러, 1TB 1,299달러에 책정됐다. 주문이 몰리면서 예약 물량은 12월, 많게는 2027년까지 밀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스팀 프레임은 새 자사 게임 대신 2020년작 하프라이프: 알릭스(Half-Life: Alyx)를 끼워 줬고, 밸브는 새 일인칭 VR 게임을 만들지 않는다고 밝혔다. 외신 평가는 갈렸다. "편하지만 값이 문제인, 너무 늦게 나온 독립형 VR"(엔가젯), "버려졌던 VR 혁명을 되살리려는 1,049달러 하드웨어"(아르스 테크니카). 출시 한 달 뒤 스팀 하드웨어 조사에서 스팀 프레임의 점유율은 0.41%였다. 전체 조사 대상 중 VR 헤드셋을 쓴 계정이 1.35%인데, 그중 0.41%포인트가 스팀 프레임이라는 뜻이다.
진짜 범인은 '램 대란'이었다
올해 VR 하드웨어가 유난히 비싸진 데는 기술 밖의 요인이 컸다. AI 데이터센터가 전 세계 D램과 낸드플래시를 쓸어 담으면서, 메모리를 많이 쓰는 기기의 원가가 통째로 뛰었다. 업계에서 '램 대란(RAMageddon)'으로 불리는 이 현상은 밸브가 6월에 내놓은 스팀 머신을 1,049달러로 끌어올렸고, 퀄컴은 9월 1일 이후 출하분부터 스냅드래곤 칩 가격을 두 자릿수 인상하겠다고 고객사에 통보했다. VR 헤드셋은 고성능 칩과 대용량 메모리를 함께 요구하는 대표적 제품이다. 부품값이 오르면 기기값이 오르고, 기기값이 오르면 수요가 식는 고리가 VR에 유독 가혹하게 작동했다.
남은 것은 안경, 그리고 '기업용' VR
반대편에서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IDC는 디스플레이가 없는 스마트 안경만 따져도 2026년 1분기에 225만 대가 팔렸다고 집계했다. 2024년 한 해 전체 판매량과 맞먹는 규모다. 이 카테고리는 2026년 한 해 1,360만 대, 2030년에는 2,730만 대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메타가 69.2%의 압도적 점유율로 1위를 달리는 가운데 레이네오(RayNeo), 샤오미(Xiaomi), 비추어(Viture), 엑스리얼(XREAL)이 뒤를 쫓는다.
진짜 위협은 생태계다. 구글은 제미나이를 앞세운 안드로이드 XR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1,799달러의 갤럭시 XR로, 스냅은 2,195달러짜리 스펙스로 각각 포진했다. 안경은 얼굴에 쓰는 부담이 덜하고 하루 종일 착용해도 어색하지 않다는 점에서 헤드셋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비자가 지갑을 여는 이유가 '몰입'에서 '착용감'으로 옮겨간 것이다.
VR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신호도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소비자 수요가 얼어붙는 와중에도 기업·정부 수요만큼은 견조했다고 짚었다. 가격에 덜 민감한 이들은 훈련과 시뮬레이션에 VR을 쓰고, 중국을 중심으로 로봇 산업이 커지면서 로봇 원격 제어·데이터 수집용 헤드셋 수요도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VR은 죽지 않았다, 게임기처럼 남았다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VR은 몰락한 것인가, 갈아탄 것인가. 답은 후자에 가깝되, 그 속내는 냉정하다. VR은 스마트폰이 되지 못했다. 대신 아타리(Atari)식 콘솔처럼, 열성 이용자와 특정 산업이 지탱하는 뚜렷한 틈새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IDC는 MR 기기가 2026년 320만 대에서 2030년 1,040만 대로 연평균 34.4% 성장하리라 보지만, 동시에 "안경이 VR·MR 헤드셋을 대체하며 XR의 주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성장은 하되, 무대의 주인공은 바뀐다는 뜻이다.
지금의 침체는 세대 교체기의 공백이라는 성격이 짙다. 메타의 초경량 헤드셋과 퀘스트4가 예고된 2027년이 VR 진영이 반등을 증명해야 할 첫 시험대다. 다만 그 승부는 스마트폰 자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게임기와 전문 장비라는 좁고 단단한 땅 위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화려한 몰입의 꿈은 접었지만, 시장은 조용히 다음 세대를 기다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