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연산 능력 확보전의 승부처가 칩에서 돈과 규제로 옮겨가고 있다. 반도체를 많이 사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막대한 투자금을 끌어오고 규제 문턱까지 넘어야 이기는 싸움이 됐다.
지난 26~28일(현지시간) 미국에서 나온 세 가지 소식이 이를 보여준다. 월가 금융사들은 앤트로픽이 쓸 AI 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약 84조 원(630억 달러) 규모 금융 거래를 발표했다. 오픈AI는 구글의 AI 전용 반도체인 텐서처리장치(TPU) 구매를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법무부는 엔비디아의 허깅페이스 인수가 AI 시장 경쟁에 미칠 영향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세 사건이 벌어진 영역은 제각각이지만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AI 산업의 경쟁력이 칩 성능과 공급량을 넘어 자본 조달력, 공급망 통제력, 규제 대응력에서 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픈AI는 구매 추진, 오라클은 공급 확정
미국 IT 매체 디인포메이션은 27일 소식통을 인용해 오픈AI가 구글 TPU를 사들일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블룸버그도 같은 내용을 전했지만 규모와 금액, 일정은 알려지지 않았고 오픈AI와 구글 모두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 오픈AI는 2025년 중반부터 구글 클라우드에서 TPU를 빌려 써왔다. 최근 TPU 최적화 엔지니어를 뽑기 시작한 것도 도입 준비로 읽히지만, 구매가 확정됐다고 보기는 이르다.
같은 날 오라클은 2027년부터 자사 클라우드에서 구글 TPU를 제공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구글 밖 대형 클라우드가 TPU를 내놓는 것은 처음이다. 업계는 이를 엔비디아 대체라기보다 공급원을 하나 더 확보해 가격 협상력을 키우려는 다변화 전략으로 본다.
엔비디아는 공급망을 먼저 묶어두는 방식으로 맞서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분기보고서를 보면 엔비디아의 공급·생산능력 확보 약정은 7월 26일 기준 약 373조 원(2790억 달러)으로, 직전 분기 약 159조 원(1190억 달러)의 2.3배다. 이미 지급한 돈이 아니라 앞으로 수년간 쓸 약정이며, 일부는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엔비디아는 지난 21일 삼성전기와의 전략적 파트너십도 처음 공식화했다. 양사는 공동 투자로 세종·부산 사업장에 AI 반도체용 패키지기판 전용 라인을 새로 짓는다.
칩 공급자가 돈까지 빌려준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앤트로픽의 자금 조달 방식에서 나타났다. 이번 거래에서는 새로 세운 특수목적법인(SPV)이 브로드컴의 AI 가속기와 네트워크 장비를 사들여 앤트로픽에 빌려준다. 선순위 대출은 뱅크오브아메리카·씨티그룹·모건스탠리가 주선하고, 후순위 금융의 확정분은 블랙스톤이 단독으로 제공한다. 장비는 2027년부터 들어오며, 브로드컴은 선순위 금융 규모에 상응하는 잔존가치 지원을 제공한다.
630억 달러는 이번에 새로 조달한 금액일 뿐, 앤트로픽이 브로드컴과 맺은 장기 리스는 이보다 훨씬 크다. 앤트로픽이 26일 제출한 기업공개(IPO) 증권신고서(S-1)에 따르면 브로드컴과의 5년 장비 리스 임대료는 이자를 빼고도 약 215조 원(1612억 달러)에 이른다. 올해 상반기 매출은 약 22조 원(163억 달러)이었다. 신고서에는 앤트로픽이 브로드컴에 최대 약 56조 원(420억 달러)의 전환사채를 발행할 수 있다는 내용과 함께, 브로드컴이 판매자와 대출자를 겸하는 데 따른 이해상충 가능성도 담겼다.
공급자는 매출을 확보하고, 구매자는 당장의 현금 부담을 던다. 문제는 AI 서비스 수익이 기대에 못 미칠 때다. 장비의 잔존가치가 떨어지면서 대출 회수 위험이 함께 불거질 수 있다. 반도체 공급망의 위험과 금융시장의 위험이 한데 묶이는 구조다.
법무부, AI 모델 '유통 창구'를 본다
로이터통신은 28일 소식통 2명을 인용해 법무부가 엔비디아의 허깅페이스 인수가 AI 경쟁에 미칠 영향을 묻고 있다고 보도했다. 거래 규모는 약 17조 원(129억 3000만 달러)으로, 주주에게 지급하는 약 16조 원(119억 달러)에 최대 약 1조 3000억 원(10억 달러)의 직원 보상 프로그램을 더한 금액이다. 쟁점은 엔비디아가 오픈소스 AI 모델의 최대 유통 창구를 손에 넣느냐다. 법무부는 수년째 이어온 엔비디아 조사의 연장선에서 칩 배정을 네트워크 장비나 그록 프로세서 구매와 엮었는지도 살피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위법 여부를 판단한 단계는 아니다.
수요만큼 '돈의 출처'를 봐야 할 때
한국은행은 27일 ‘AI 산업 자금조달의 주요 특징과 리스크 평가' 보고서에서 AI 산업의 돈줄에 쌓이는 위험을 세 가지로 짚었다. 첫째, AI 기업들이 벌어들인 돈보다 빌린 돈에 점점 더 기대고 있다. 둘째, 특수목적법인이나 합작법인을 앞세워 자금을 조달하면서 실제 빚이 재무제표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셋째, 빅테크와 칩 제조사가 AI 개발사에 투자하고, 그 개발사가 다시 투자한 회사의 클라우드와 칩을 사는 '순환금융'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 빅테크 5곳이 올해 1~9월 발행한 회사채는 약 307조 원(2300억 달러)으로 지난해 연간 발행액의 두 배를 넘었다. 국제결제은행(BIS)도 같은 날 AI 인프라 투자가 장기 부채와 복잡한 금융 구조에 갈수록 기대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한은은 주요 기업의 재무 상태와 실제 수요를 감안하면 당장 금융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진단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AI 컴퓨트 투자 확대의 핵심 수혜 산업이다. AI 칩 공급처가 다양해질수록 메모리와 패키징 수요도 늘어날 수 있다. 반대로 거대한 차입과 장기 계약 위에 쌓은 투자가 흔들리면 그 충격 역시 공급망을 타고 전해질 수 있다. 이제는 AI 반도체 수요가 얼마나 늘지뿐 아니라, 그 수요를 떠받치는 돈이 어디서 나오고 누가 최종 위험을 지는지도 따져봐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