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글로벌 AI 업계가 사상 최대 인프라 투자 경쟁에 돌입했다. 맥킨지는 2030년까지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7조달러(약 9500조원)가 필요하다고 전망했고, 스탠퍼드 'AI 인덱스 2025'는 2024년 미국 민간 AI 투자가 1091억달러로 중국의 12배에 달한다고 밝혔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등 AI 시대에도 주도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글로벌 빅테크들은 운영 현금흐름의 60%를 AI 인프라에 투입 중이며, IDC는 2025년 글로벌 서버 시장이 전년 대비 134% 급증할 것으로 예측했다. 반면 한국의 민간 AI 투자는 2024년 13.3억달러로 오히려 감소했다. 컴퓨팅 파워가 '21세기의 원유'로 부상하는 지금, 한국 스타트업은 저비용 GPU 접근성 확보,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 모델 경량화 전략이 시급하다. 인프라 전쟁에서 뒤처지면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무용지물이다. 이에 테크42는 최근 AI 스타트업의 현황과 정책적 제언, 글로벌 전략 등을 담은 리포트를 살펴보고 한국 AI 스타트업의 현황과 문제점 진단, 글로벌 전략 등을 3회에 걸쳐 시리즈로 소개한다. ‘한국 딥테크 보고서(레달, 2025.06)’ ‘스타트업이 기대하는 AI 정책 방향 리포트(스타트업얼라이언스, 2025. 10)’ ‘AI 스타트업 생태계 혁신방안: 투자·인재·규제 시스템을 중심으로(삼쩜삼 리서치랩, 스타트업성장연구소, 2025. 10) 등을 참고했다.

3개월마다 새로운 AI 모델이 쏟아지는데, 관련 법령은 여전히 연 단위로 움직인다. 이 '타임 갭'이 한국 AI 스타트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삼쩜삼을 운영하는 자비스앤빌런즈의 정책연구소가 스타트업성장연구소와 함께 펴낸 분석 보고서는 바로 이 시차를 한국 AI 산업의 가장 큰 적으로 지목한다. 기술 개발 속도와 제도 개선 속도 사이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혁신 기업들은 법적 불확실성 속에서 지쳐간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대비가 눈에 띈다. 세계 AI 기술 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은 6등이다. 그런데 민간 투자 규모 순위는 18등으로 추락한다. 12계단이나 차이 나는 이 역설 뒤에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가 숨어있다.
벤처 자본이 AI로 몰리고 있다. 작년 한 해 전 세계 VC 투자의 40%가 AI 스타트업으로 향했고, 올해 1분기엔 그 비율이 58%로 뛰었다. 금액으로는 730억 달러가 AI에 집중됐는데, 그중 절반이 넘는 400억 달러가 OpenAI 하나에 몰렸다.
이는 AI가 단기 버블이 아니라 장기 성장 동력이라는 시장의 판단을 보여준다. 삼쩜삼 리서치랩은 "AI 기업은 이제 실험실 프로젝트가 아니라 시장 검증을 받는 사업체로 인식된다"며 "공공 재원만으론 한계가 있고, 민간 투자와 회수 메커니즘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짚었다.
한국의 기술 수준은 나쁘지 않다. 영국 조사기관 토터스 미디어의 '글로벌 AI 지수 2024'에서 한국은 83개국 중 6위를 차지했다. 특히 정부 AI 전략과 산업 적용 분야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작년(62개국 중 6위) 대비 평가 대상이 늘었는데도 순위를 지켰다는 건 한국의 AI 역량이 견고하다는 증거다.
그런데 투자는 딴판이다. 민간 AI 투자 규모는 세계 18위에 불과하다. 지난 10년(2013~2022) 누적 투자액은 55.7억 달러로, 미국의 2.2%, 중국의 5.9%에 그친다. 국내 연간 벤처 투자가 10조원을 넘는데도, 고위험 AI 스타트업에는 자금이 제때 닿지 않는다. 회수 시장이 취약하고 심사가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강점과 약점의 극명한 대조
한국 AI 스타트업의 강점 카드는 확실하다. 세계 최고 디지털 인프라(5G, 초고속망, 데이터센터), 탄탄한 이공계 인력(STEM 졸업생 9위, IT 졸업생 8위), 반도체·전자·통신 제조 기반, 높은 기술 수용도(스마트폰 보급률 95% 이상) 등이다.
하지만 약점도 명확하다. AI 실무 인력 절대 부족(1.1만 명 vs 미국 25만·중국 34만 명), 빈약한 회수 시장(AI 상장사 6개뿐, IPO 쏠림), 느린 규제 개선, 내수 중심 사업 모델(해외 진출 노하우 부족) 등이 걸림돌이다.
특히 인재가 빠져나간다. 국내 AI 박사 중 스타트업 취업은 5%도 안 된다. 해외 고급 인력 유입은 OECD 평균의 1/5(1.3%)에 그친다. 반면 국내 AI 박사 유학생 절반 이상은 해외 취업을 택한다. 낮은 초봉, 불안정한 고용, 제한된 인센티브(스톡옵션), 산학연 협력 부족이 원인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기술과 인프라는 세계급인데, 투자·인재·제도가 뒤따르지 못해 정체 중이다. 리서치랩은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스타트업이 자랄 수 있는 생태계가 없다는 게 문제"라며 "자본·인재·제도 세 축이 함께 복원돼야 AI 강국도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AI 기업 101곳을 조사한 결과, 흥미로운 패턴이 드러났다. 기업이 어느 성장 단계에 있느냐에 따라 필요로 하는 정책 지원이 완전히 달랐다. 일률적 지원책이 아니라 단계별 맞춤 설계가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초기(시드): 데이터와 컴퓨팅이 생명줄
투자 5억원 미만 초기 기업들은 '데이터 접근(35.3%)'과 'AI 인프라(29.4%)'를 최우선으로 꼽았다. 연구개발에 필수인 데이터와 컴퓨팅 파워 확보가 가장 힘들다는 뜻이다.
실제로 시드 단계의 56%가 공공데이터를 쓰고 있지만, 절반 가까이(41.2%)는 "필요한 데이터가 비공개거나 접근이 제한적"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품질·표준화 미흡(29.4%)", "상업 이용 제한(14.7%)", "업데이트 주기 느림(14.7%)" 등도 장애물로 꼽혔다.
공공데이터를 안 쓰는 기업들의 이유는 더 근본적이다. "관련 데이터 자체가 없거나 찾기 어렵다(37.5%)", "품질·최신성 신뢰 안 간다(31.3%)", "활용법을 모른다(18.8%)" 등이다. 단순 '공개'를 넘어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체계와 법적 근거 마련이 시급하다는 신호다.
세부 정책으로는 '국가 데이터 허브(15.8%)', 'GPU·클라우드(13.9%)', '유니콘 육성(12.9%)' 등이 기대를 모았다. 초기 기업은 큰 돈보다 기술 개발 필수 자원을 싸게 쓸 수 있는 지원을 원한다.
중기(프리A·A): 규제가 발목을 잡는다
투자 5억~50억원 구간으로 성장하면 수요가 'R&D 실증'과 '규제 개선'으로 옮겨간다. 프리A 단계는 규제 혁신(31.8%) 기대가 가장 강했고, 시리즈A는 R&D 실증(30.8%)과 규제 혁신(19.2%)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기술을 검증하고 시장에 내놓으려 할 때, 기존 법령과 신사업 간 충돌이 가장 격렬해지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는 "기존 제도가 신산업을 담지 못해 기업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고 짚었다.
리서치랩은 더 구체적으로 진단한다. "창업 초기엔 신산업 관련 법적 근거가 애매해 인허가가 길어지고, 성장기엔 데이터 활용·모델 학습에 필요한 개인정보·저작권 기준이 불명확해 사업 예측이 어렵다"는 것이다.
세부 정책으로는 '가명·비식별 데이터(프리A 1~3순위 합산 40.9%)', '성장 펀드·모태펀드', 'R&D 실증' 등이 주목받았다. 특히 가명 데이터 기대가 급등하는데, AI 모델 학습과 서비스 출시에 데이터 접근과 법적 명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후기(B 이상): 스케일업과 글로벌의 벽
투자 50억원 이상 단계에서는 '규제 혁신(28.6%)', 'AI 인프라(28.6%)', '투자·금융(21.4%)'이 핵심으로 떠올랐다. 규모를 키우고 해외로 나가려 할 때, 제도 장벽 제거와 대형 자금 확보가 가장 절실해진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는 "규제는 성장 단계가 올라갈수록 더 큰 영향을 미치며, 기업의 확장 성공과 글로벌 진출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고 강조했다. 시리즈C 이상에서는 규제 혁신(50.0%), 인프라(33.3%), 글로벌 협력(16.7%) 순으로 정책 수요가 나타났다.
세부 정책으로는 '유니콘 육성(B 단계 1순위 28.6%)', '성장 펀드', 'GPU·클라우드' 등 큰 돈과 인프라 지원이 기대를 모았다. 해외 진출용 글로벌 협력 정책 수요도 커졌다.
눈에 띄는 건, 모든 단계에서 'AI 인프라' 기대가 일관되게 높았고, '규제 혁신' 필요성이 전 주기에 걸쳐 반복됐다는 점이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는 "규제 혁신은 전 단계 공통 요구이므로, 실효성 있는 제도로 구체화돼야 한다"고 못 박았다.
정리하면, 초기는 데이터·인프라, 중기는 R&D·규제·금융, 후기는 규제·대형 자금·글로벌 지원이 핵심이다. 정부 정책이 인프라·돈을 넘어, 단계별 규제 수요를 세밀히 반영한 설계로 진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삼쩜삼 리서치랩은 한국 AI 기업이 부딪히는 규제의 구조적 문제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허용 원칙 부재로 새 모델 검증에만 수개월 소요. 둘째, 샌드박스 실효성 저하로 승인 지연·연장 제한·법제화 단절 반복. 셋째, AI 규제 애매모호로 생성형 AI 책임·윤리 기준 해석 제각각. 넷째, 부처별 분산 규제로 기준 들쑥날쑥, 사업 시작 늦어짐.
보고서는 세 가지 핵심 처방을 내놨다.
처방 1: 의료·로봇·금융은 허용 원칙으로
리서치랩은 의료, 로봇, 금융 3대 분야에서 '원칙 허용·예외 금지' 방식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했다. 지금은 명시된 것만 허용하는 방식이라 신기술이 나올 때마다 법 개정을 기다려야 한다. 기술 속도를 못 따라가고, 기업들은 법적 불확실성에 시달린다.
핵심은 위험도 기준 마련이다. "안전·윤리·시장 영향을 반영한 위험도 지표를 만들고, 고·중·저 등급별로 규제를 다르게 적용하되, 저위험은 신고만으로 시작하게 한다"는 것이다.
로드맵은 3년마다 개정, 신기술은 수시 재분류로 시의성을 확보한다. 기술 적용 범위를 넓히고 신제품 출시 속도를 확 앞당길 수 있다. 보고서는 "문턱을 낮추되 안전성도 지키는 균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처방 2: 3개월 승인, 4년 연장 가능한 빠른 샌드박스
지금 샌드박스는 절차 복잡, 승인 느림, 기간 짧음, 연장 어려움, 법제화 단절 등으로 "이름뿐"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리서치랩은 AI 전용 '빠른 샌드박스'를 새로 만들고 기존 제도를 뜯어고치자고 제안했다.
핵심 개선안은 ▲신청~승인 3개월 이내 ▲서류 최소화 ▲실증 후 상용화 의무 폐지 ▲최대 4년 연장 ▲심사 기준 표준화·통합 매뉴얼로 예측 가능성 확보다. "실증→상용화 선순환을 만들고 진입·확장 속도를 높인다"는 설명이다.
특히 지금은 실증 성공해도 본 법령 개정이 안 돼 계속 실증 단계에 머물러야 하는 문제가 있다. 새 제도는 실증 성공 시 자동으로 정식 허가로 바뀌는 장치를 넣어, 실효성을 높인다.
처방 3: 국무총리실 직속 통합 창구
부처별로 흩어진 권한과 해석 차이를 해소하려면, 국무총리실 산하 'AI혁신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리서치랩은 제안했다. 이 위원회가 허가·심사 통합 창구가 되고 부처 간 조정 권한을 갖는다.
구체적 역할은 ▲신기술 사전 점검 ▲부처 간 조정·협의 표준화 ▲샌드박스·빠른 제도 연동으로 심사 단축 ▲규제 해석·집행 일관성 확보 등이다. 이를 통해 해석 일관성 확보, 사업 시작 지연 최소화, 부처 갈등 완화가 가능하다고 봤다.
지금 AI 규제는 과기정통부(기본법), 개인정보위(데이터), 복지부(의료), 금융위(핀테크), 국토부(자율주행) 등에 쪼개져 있다. 융합 서비스는 여러 부처 승인을 각각 받아야 하고, 부처마다 기준이 달라 사업이 늦어진다. AI혁신위원회가 이런 분산 규제를 통합 조정하는 사령탑 역할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