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정주영 창업경진대회'가 올해부터 문턱을 대폭 낮췄다. 18일 발표된 '다양성 트랙(아산 상회)' 선발 결과를 보면, 탈북민 5팀에 더해 미국·일본·대만·러시아·스페인 출신 외국인 창업가 4팀이 이름을 올렸다.
이는 한국 창업 생태계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다. 대부분의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 한국인, 그것도 20~30대 청년에 집중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산나눔은 "국적과 배경이 다르다고 창업 역량까지 다른 건 아니다"는 원칙으로 지원 범위를 확장했다.
'아산 상회', 정주영의 첫 사업에서 이름 따왔다
'아산 상회'라는 이름은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의 호(號) '아산(峨山)'과 그의 첫 창업 아이템인 '경일상회'에서 따왔다. 정주영 회장 역시 북한 출신으로, 해방 직후 월남해 인천에서 쌀가게를 열었던 경험이 있다.
재단 측은 "배경과 상관없이 도전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게 정주영 정신의 핵심"이라며 "아산 상회는 그 철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선발된 9개 팀의 사업 분야는 다채롭다. △푸드테크 △마케팅 △교육 △라이프스타일 등 업종이 골고루 분포했다. 특히 이주민 창업가들은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사업 아이템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동남아 출신 창업가는 자국 음식 문화와 한국 식품 유통을 연결하는 플랫폼을 구상 중이고, 일본 출신 창업가는 한일 양국 소비자를 타겟으로 한 크로스보더 커머스를 준비하고 있다.
탈북민 창업가 중에는 북한 이탈 주민들의 정착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바탕으로 교육 솔루션을 개발하는 팀도 있다. 재단 관계자는 "이들의 사업 아이템은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시장성과 확장성도 충분히 검증됐다"고 평가했다.
선발된 9개 팀은 앞으로 6개월간 집중 지원을 받는다. 핵심 혜택은 다음과 같다.
△초기 사업화 자금 700만원 (팀당) △언어·문화 맞춤형 1:1 멘토링 △인사이트 특강 및 피칭 컨설팅 △투자자 연결 프로그램 △정기 네트워킹 커뮤니티
특히 언어·문화 장벽을 고려한 맞춤형 지원이 눈에 띈다.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은 외국인 창업가를 위해 통역 지원과 영어 멘토링이 제공되고, 한국 비즈니스 문화에 대한 별도 교육도 진행된다.
9개 팀 중 일부는 하반기 결선 심사를 거쳐 '통합 데모데이' 무대에 오를 기회를 얻는다. 총 5개 팀이 최종 선발되며, 이들은 투자자와 창업 생태계 주요 인사들 앞에서 사업을 피칭한다.
데모데이에서는 총상금 5,900만원이 수여된다. 여기에 더해, 프로그램 이수 후 외부 투자 유치나 정부 창업패키지 선정에 성공한 팀에는 '매칭그랜트' 방식으로 최대 5천만원을 추가 지원한다.
매칭그랜트는 팀이 확보한 투자금액, 기업가치, 팀 역량 등을 종합 평가해 지급액을 결정한다. 작년에는 탈북 청년 출신 최철만 대표의 'AI 투자자 매칭 플랫폼' 박스레더가 이 지원금을 받았다.
정창경 2025: 4개 트랙으로 확대 개편
아산 상회는 '정주영 창업경진대회(정창경)'의 한 축이다. 올해 정창경은 대대적 개편을 단행했다. 기존 단일 트랙 방식에서 벗어나 ▲글로벌 트랙 ▲다양성 트랙(아산 상회) ▲기후테크 트랙 ▲예비창업 트랙 등 4개 분야로 세분화했다.
이는 창업가의 배경과 사업 단계에 맞춘 '맞춤형 지원'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각 트랙은 기존 아산나눔재단의 개별 프로그램과 연계되며, 하반기 통합 데모데이에서는 총상금 4억원이 걸린다.
박성종 아산나눔재단 사회혁신팀장은 "올해 정창경 다양성 트랙은 기존 탈북민 중심에서 이주민과 외국인까지 범위를 넓혔다"며 "이들이 한국 창업 생태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펼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다양성 창업 지원'은 해외에서는 이미 주류 정책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중 약 55%가 이민자 또는 이민 2세대가 창업했다는 통계가 있다. 구글, 테슬라, 인스타그램 등이 대표적이다.
영국은 '스타트업 비자(Start-up Visa)' 제도로 외국인 창업가를 적극 유치하고, 독일은 난민 출신 창업가를 위한 전용 엑셀러레이터를 운영한다. 문화적 다양성이 혁신의 원천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다.
한 창업 생태계 전문가는 "한국은 아직 '한국인 청년 창업가' 중심 지원 구조가 강하다"며 "아산나눔의 시도가 다른 기관에도 확산되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다양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전 과제: 비자·제도적 장벽 여전
다만 외국인 창업가들이 넘어야 할 현실적 장벽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비자다. 한국에서 창업하려면 'D-8-4(스타트업 비자)' 또는 'F-2(거주)' 비자가 필요한데, 취득 조건이 까다롭다.
또한 법인 설립, 은행 계좌 개설, 정부 지원사업 신청 등 행정 절차도 외국인에게는 높은 벽이다. 한국어로 된 서류 작성과 복잡한 규정이 발목을 잡는다.
아산나눔 관계자는 "재단 차원에서 행정 지원과 법률 자문을 제공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며 "정부와 협력해 외국인 창업 친화적 환경을 만드는 데도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