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는 모델로, 앤트로픽은 반도체 역량으로…AI 산업 ‘경계 붕괴’ 본격화

엔비디아, 풀사이드 기술·인재 확보…GPU 넘어 AI 모델 영역까지 확장
앤트로픽은 구글 TPU 사업 주도 인물 영입…모델 기업에 반도체 역량 내재화
투자·라이선스·인재 이동·협력 뒤섞여…‘한 기업 한 영역’ 공식 흔들
엔비디아와 앤트로픽을 중심으로 반도체·AI 모델·데이터센터·컴퓨팅 영역이 서로 겹쳐지고 있다. AI 산업에서 기업별 역할 경계가 빠르게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AI로 생성)

인공지능(AI) 산업을 구분해 온 기업 간 경계가 빠르게 흐려지고 있다. 엔비디아가 AI 가속기를 공급하고, 오픈AI·앤트로픽 등 AI 기업이 그 컴퓨팅 인프라 위에서 모델을 개발하던 역할 구분이 최근 모호해지고 있다.

변화의 한쪽에는 엔비디아가 있다. GPU를 중심으로 AI 컴퓨팅 시장을 주도해 온 엔비디아는 최근 AI 스타트업 풀사이드(Poolside)의 모델 개발 기술을 대규모로 라이선스하고 개발 인력까지 확보했다. 이미 자체 오픈 모델 ‘네모트론(Nemotron)’을 확대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한국 AI 반도체 기업 리벨리온(Rebellions)과도 기술 협력과 투자 등을 포함한 초기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데이터센터 인프라 개발사에는 직접 투자했고, 글로벌 금융회사들과 AI 컴퓨팅 인프라를 위한 대규모 자금 조달 체계 구축에도 나섰다.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AI 모델 ‘클로드(Claude)’를 개발하는 앤트로픽(Anthropic)은 지난 21일 구글의 자체 AI 반도체인 텐서처리장치(TPU) 사업을 이끌었던 아미르 살렉(Amir Salek)을 컴퓨팅 조직에 영입했다. AI 모델 개발사 내부로 대규모 AI 반도체 개발 경험을 가진 핵심 인력이 이동한 것이다.

최근 일련의 움직임을 종합하면 반도체와 모델, 데이터센터와 금융으로 나뉘었던 AI 산업의 전통적인 기업 구분만으로 각 회사를 설명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는 전통적인 인수·합병(M&A)을 넘어 기술 라이선스, 핵심 인재 영입, 지분 투자, 전략적 협력 등 다양한 방식의 합종연횡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GPU 경계 넘어선 엔비디아…모델·AI 반도체·데이터센터까지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풀사이드, 리벨리온, 클로버리프 등과의 기술·투자·협력 관계가 진행 중이다. 엔비디아의 사업 접점은 GPU를 넘어 AI 모델과 반도체 생태계, 데이터센터 인프라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미지=AI로 생성)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엔비디아다. AI 전문 뉴스레터 뉴커머(Newcomer)는 지난 20일 풀사이드가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한을 입수해 엔비디아와 풀사이드 간 거래 내용을 처음 보도했다. 이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3일 엔비디아가 풀사이드의 AI 모델 개발 기술을 라이선스하는 데 60억달러를 투입하고, 별도로 풀사이드에 10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보도했다. 풀사이드의 투자 전 기업가치는 120억달러로 평가됐다.

각 외신의 보도를 종합하면 엔비디아는 풀사이드가 자체 AI 모델 개발에 사용하는 내부 플랫폼 ‘모델 팩토리(Model Factory)’ 기술을 비독점 방식으로 라이선스한다. 엔비디아는 풀사이드 직원 100명 이상에게 합류를 제안했으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엔비디아의 자체 AI 모델 네모트론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풀사이드 창업진은 회사에 남고 법인도 독립적으로 유지된다.

이 거래가 주목되는 이유는 엔비디아가 이미 AI 모델 자체를 사업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지난 11일 공식 기술 블로그를 통해 ‘네모트론 3.5 라이트닝(Nemotron 3.5 Lightning)’을 공개했다. 300억개 파라미터 규모의 전문가 혼합(MoE) 구조를 적용한 오픈 모델로, 장시간 작동하는 AI 에이전트와 에이전틱 AI 작업에 초점을 맞췄다. 엔비디아는 GPU와 CUDA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AI 애플리케이션에서 사용되는 모델 계층까지 제품군을 확장하고 있다.

풀사이드와의 거래 방식 역시 처음은 아니다. 엔비디아와 AI 추론 반도체 스타트업 그록(Groq)은 지난해 12월 24일 비독점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그록이 같은 날 공식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그록의 추론 기술을 라이선스하는 동시에 창업자 조너선 로스와 사장 서니 마드라를 비롯한 일부 인력을 영입했다. 그록은 별도 회사로 존속했다. 빅테크가 기업 전체를 인수하지 않고 기술과 핵심 인재를 함께 확보하는 거래 방식인 셈이다.

한국 AI 반도체 기업과의 접점도 확인됐다.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 엔비디아 본사에서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를 만나 잠재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수의 관계자를 통해 전해진 논의 대상에는 기술 협력과 투자 등이 포함됐다. 다만 협상은 초기 단계로 현재까지 양사가 특정 거래에 합의했다는 발표는 없다.

한편 업계에서는 엔비디아의 사업 접점이 데이터센터 인프라로도 넓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 데이터센터 개발사 클로버리프 인프라스트럭처(Cloverleaf Infrastructure)에 소수 지분 투자를 단행 것을 두고 나온 말이다. 클로버리프는 전력회사와 에너지 공급자, 투자자 등을 연결해 데이터센터 부지와 전력 인프라를 확보하는 기업이다.

엔비디아와 클로버리프는 미국 내 AI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개발을 함께 추진한다. 클로버리프가 데이터센터 부지와 전력 확보를 담당하고 엔비디아가 AI 컴퓨팅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특히 이 투자가 엔비디아가 소프트뱅크 계열 데이터센터 개발사 SB에너지에 15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밝힌 지 며칠 만에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자본 조달 영역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엔비디아와 아폴로, 블랙록, 블랙스톤, 브룩필드, 골드만삭스, KKR은 지난 10일 공동 발표를 통해 독립적인 AI 컴퓨팅 인프라 금융 플랫폼 구축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과 양해각서(MOU)를 공개했다. 장기간에 걸쳐 5000억달러 이상의 제3자 자본을 AI 인프라 구축에 동원하는 것이 목표다.

이처럼 GPU를 중심으로 성장해 온 엔비디아의 사업 접점은 모델 개발과 AI 반도체 협력, 데이터센터 인프라, 금융 영역으로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반도체 역량 모으고 있는 앤트로픽

앤트로픽은 최근 구글 TPU 개발을 이끌었던 아미르 살렉을 컴퓨팅 조직에 영입하며 하드웨어 전문성을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미지=AI로 생성)

엔비디아가 하드웨어에서 AI 모델과 인프라 쪽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면 AI 모델 기업에서는 반대 방향의 이동이 확인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구글의 자체 반도체 프로그램을 만든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아미르 살렉을 자사 컴퓨팅 팀에 영입한 앤트로픽 사례가 꼽히고 있다. 살렉은 앤트로픽의 컴퓨팅 부문을 이끄는 제임스 브래드버리(James Bradbury)에게 보고하게 된다.

살렉은 구글에서 자체 AI 반도체 개발 조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살렉은 2013년 구글에 합류해 데이터센터용 커스텀 실리콘 개발 조직을 구축하고 이끌었다. 구글 최초의 자체 생산 칩인 TPUv1을 비롯해 TPU와 Edge TPU, VCU, IPU 등 여러 커스텀 실리콘 제품군 개발을 주도했으며 2022년 구글을 떠났다. 구글 합류 이전에는 엔비디아에서도 근무했다. AI 모델을 만드는 앤트로픽이 다른 AI 모델 연구자가 아니라 대규모 AI 반도체 개발 경험을 가진 인물을 컴퓨팅 조직에 영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 앤트로픽은 하나의 반도체 업체에 의존하지 않고 엔비디아 GPU와 구글 TPU, 아마존의 AI 가속기 등 여러 종류의 컴퓨팅 자원을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앤트로픽은 다양한 공급업체에서 AI 컴퓨팅 자원을 조달하며 살렉을 영입한 것이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이번 인사가 앤트로픽 내부의 하드웨어 역량 확대와 맞물려 있다고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엔비디아가 자체 AI 모델을 개발하면서 모델 스타트업의 기술과 인력을 확보하고 있다면 앤트로픽은 AI 모델 개발 조직 안으로 반도체 설계와 컴퓨팅 인프라 경험을 끌어들이고 있다. 과거 공급자와 고객이라는 거래 관계로 연결됐던 AI 반도체와 모델 개발 역량이 각 기업 내부에서 서로 겹치기 시작한 셈이다.

인수만이 아니다…라이선스·투자·인재 이동으로 무너지는 기업 경계

엔비디아·앤트로픽을 비롯한 AI 관련 기업들이 기술 라이선스, 투자, 인재 이동, 인프라 협력으로 연결되는 산업 구조. 최근 AI 업계에서는 전통적인 인수·합병을 넘어 다양한 방식의 기업 간 결합이 확산되고 있다. (이미지=AI로 생성)

최근 AI 업계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단순한 ‘빅테크의 M&A 경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실제 기업들이 선택하고 있는 방식이 전통적인 기업 인수보다 훨씬 다양하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엔비디아와 풀사이드의 관계는 기업 전체를 사들이지 않고 기술 라이선스와 인재 확보, 지분 투자를 결합한 형태다. 지난해 12월 그록과의 거래 역시 비독점 기술 라이선스와 핵심 경영진·기술인력 영입을 결합했다. 리벨리온과는 기술 협력과 투자를 포함한 초기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클로버리프에는 소수 지분을 투자했다. 아폴로·블랙록·블랙스톤 등 글로벌 금융회사와는 기업 인수가 아닌 AI 컴퓨팅 인프라 금융 플랫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거래가 엔비디아만의 사례는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메타, 아마존 등 대형 기술기업들 역시 유망 AI 스타트업을 완전히 인수하지 않고 기술 라이선스와 핵심 인재 영입을 결합하는 거래를 활용하는 추세다.

결국 현재 AI 산업에서 벌어지는 합종연횡의 특징은 하나의 기업이 다른 기업을 통째로 사들이는 데만 있지 않다. 필요한 기술은 라이선스로 확보하고 핵심 인력은 직접 영입한다. 필요한 기업에는 지분을 투자하고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면 전문 개발사와 협력한다. 여기에 AI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글로벌 금융자본까지 새로운 관계망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산업 분류도 희미해지고 있다. 엔비디아를 단순히 GPU 회사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AI 모델과 소프트웨어, 데이터센터 인프라 투자·협력, AI 인프라 금융에 걸쳐 사업 접점이 형성되고 있다. 앤트로픽 역시 AI 모델 연구개발을 넘어 컴퓨팅과 반도체 개발 경험을 조직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 엔비디아와 앤트로픽을 둘러싼 일련의 움직임은 ‘반도체 회사’, ‘AI 모델 회사’, ‘데이터센터 회사’라는 기존 분류만으로 각 기업의 사업 영역을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 라이선스와 투자, 핵심 인재 이동, 인프라 협력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기업들은 이미 상대 영역의 기술과 역량을 자신의 사업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황정호 기자

jhh@tech4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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