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사의 경쟁이 고객을 자사 앱 안에 오래 머물게 하는 싸움에서, 인공지능(AI)이 어떤 금융상품을 찾아 비교하고 실제 거래까지 연결하느냐를 둘러싼 경쟁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소비자가 여러 금융사를 직접 찾아다니던 과정 일부를 AI 에이전트가 대신하게 되면 금융시장의 핵심 경쟁축도 ‘고객 접점’에서 ‘선택을 조직하는 능력’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일 토스 금융경영연구소 토스인사이트는 ‘AI 파이낸스 연구 시리즈’ 두 번째 보고서 ‘AI, 금융의 경쟁을 다시 그리다’를 통해 AI 에이전트 확산이 금융산업의 경쟁 구조에 미칠 영향을 분석했다. 지난 6월 공개한 ‘AI, 금융의 역사를 다시 그리다’에 이은 후속 연구로, 전체 시리즈는 역사·경쟁·사람·리스크·전략 등 5개 주제를 다룬다.
보고서가 주목한 변화는 AI의 역할이 단순한 상담이나 정보 검색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AI 에이전트가 이용자의 소득과 자산, 부채, 재무 목표 등을 토대로 여러 금융사의 조건을 비교하고 선택과 거래를 지원하는 구조다. 적용 범위도 예금·대출뿐 아니라 투자상품 선택과 포트폴리오 조정, 보험 보장 비교와 계약 관리 등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봤다.
이런 변화가 현실화되면 금융사가 고객을 자체 앱에 묶어두며 확보해왔던 경쟁 우위에도 균열이 생길 수 있다. 지금까지는 더 유리한 상품이 다른 금융사에 있더라도 소비자가 이를 직접 검색하고 조건을 비교한 뒤 이동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과 번거로움 자체가 고객 이동을 막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AI 에이전트가 이 탐색 비용을 낮추면 상황은 달라진다. 금융사의 브랜드나 앱 접근성만으로 고객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상품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 개별 이용자에게 적합한 선택지를 평가할 수 있는지, 거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안정적으로 처리하고 복구할 수 있는지가 새로운 경쟁 요소로 부상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금융사 대신 AI가 새로운 ‘관문’ 될 수도
AI 에이전트가 소비자의 선택지를 무조건 넓히는 것만은 아니다. 보고서는 기존 금융사의 영향력이 줄어든 자리를 일부 AI 에이전트가 차지할 가능성도 함께 짚었다.
소비자가 다양한 에이전트를 자유롭게 이용하면서 여러 금융상품을 비교할 수 있다면 선택 폭은 확대된다. 반대로 소수 범용 에이전트가 이용자에게 어떤 상품을 노출하고 추천할지를 좌우하게 되면 금융사를 대신하는 새로운 시장 진입 관문이 만들어질 수 있다.
에이전트 간 판단이 비슷해질 가능성도 위험 요인이다. 여러 AI 에이전트가 동일하거나 유사한 데이터와 AI 모델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경우 특정 상품이나 거래 방향으로 움직임이 동시에 몰릴 수 있어서다.
토스인사이트는 앞으로 시장 구조가 하나의 형태로 수렴하기보다 여러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제시했다. 소비자가 다양한 에이전트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시장, 소수 범용 에이전트에 영향력이 집중되는 시장, 기존 금융사와 외부 에이전트가 기능을 나누는 시장 등이 함께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AI 성능보다 중요한 ‘권한과 책임’
시장 규칙 역시 AI 기술의 성능만을 기준으로 설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고서의 제언이다. 특정한 미래 시장 구조를 먼저 정하기보다 에이전트가 신뢰받으며 금융 거래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라는 설명이다.
필요한 요소로는 금융상품을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는 정보 체계와 신원 확인, 이용자가 에이전트에 부여한 권한을 관리하고 철회할 수 있는 장치, 거래 기록 보존과 오류 발생 시 복구할 수 있는 체계 등이 꼽혔다. 이후 특정 에이전트의 시장 영향력이 커지면 그 수준에 맞춰 규율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결국 에이전트 금융시장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어느 AI가 더 똑똑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소비자의 선택 과정을 통제하는지, 이용자가 다른 금융사나 에이전트로 얼마나 쉽게 이동할 수 있는지, 잘못된 판단이나 거래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누가 부담하는지가 금융 경쟁의 핵심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유재원 토스인사이트 디지털금융연구팀 연구위원은 “AI 에이전트가 확산되면 소비자가 은행·증권·보험사를 하나씩 찾아다니며 상품을 비교하던 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며 “금융회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선택을 누가 조직하느냐가 핵심이며, 소비자 선택권을 넓히면서 새로운 중개자에게 영향력이 과도하게 쏠리지 않도록 시장의 기본 규칙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