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전 세계 AI 산업의 권력자들이 모였다. 엔비디아(NVIDIA)의 젠슨 황(Jensen Huang), 오픈AI(OpenAI)의 샘 알트만(Sam Altman), 앤트로픽(Anthropic)의 다리오 아모데이(Dario Amodei), 그리고 브로드컴(Broadcom)의 혹 탄(Hock Tan).

이들 앞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하나의 선언을 던졌다. "대한민국은 대체 불가한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국가로 도약할 것." 이 선언은 허언이 아니었다. 같은 자리에서 삼성전자와 SK그룹은 미국 빅테크들과 총 9500억달러, 한화로 약 1390조원에 달하는 협력안을 체결했다.
전례 없는 규모다. 단순 거래가 아니라 2030년까지 5년간 지속되는 장기 파트너십이며, AI 인프라의 핵심 요소인 메모리·파운드리·패키징 전반을 아우르는 통합 계약이다. 이 협력의 중심에는 세 가지 기술적 무기가 있다. SK하이닉스의 HBM4, 삼성전자의 2나노 파운드리, 그리고 SK텔레콤이 구축할 기가와트급 AI 데이터센터다.
■ 엔비디아가 물량의 3분의 2를 SK하이닉스에 맡긴 이유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인 HBM4 시장에서 SK하이닉스는 압도적 우위를 점했다. 올해 1월 업계 소식에 따르면 엔비디아가 베라 루빈(Vera Rubin) 플랫폼 등 차세대 AI 칩에 탑재할 HBM4 물량의 약 3분의 2를 SK하이닉스에 배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전체 물량의 70%에 가까운 비중을 확보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Counterpoint)가 지난해 말 전망한 54%보다 16%포인트나 높은 수치다.
물론 이 자리에 다른 기업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오히려 HBM4 양산 출하 자체에서 '세계 최초' 타이틀을 가져갔다. 지난 2월 12일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HBM4 양산 출하에 성공했고, 뒤이어 SK하이닉스가 양산에 돌입하며 6세대 HBM 시장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됐다. 삼성전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5월 29일에는 HBM4E 샘플까지 세계 최초로 고객사에 출하하며 기술 리더십을 이어갔다.
SK하이닉스가 물량 배정에서 우위를 점한 배경은 단순히 기술적 우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장기간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고객사들과 구축해온 HBM 파트너십, 대규모 양산 과정에서 입증된 높은 수율이 만들어낸 신뢰가 물량으로 전환된 결과다. 이제 HBM 시장은 기술 경쟁 단계를 넘어 안정적 품질과 양산 능력이 승부처가 됐다는 것이 업계 공통된 진단이다.
SK그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엔비디아와 5000억달러, 약 730조원 규모의 AI 인프라 협력 의향서(LOI)를 체결하며 메모리 공급을 넘어 AI 인프라 전반으로 협력 범위를 확장했다. SK텔레콤은 국내에 최대 2기가와트 규모의 AI 팩토리를 구축하고,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차세대 메모리를 장기 공급하며 대규모 언어모델 학습부터 피지컬 AI까지 확장되는 인프라 수요에 맞춰 AI 메모리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 삼성전자가 꺼낸 '원스톱 턴키 솔루션' 전략
브로드컴과 2000억달러, 약 290조원 규모의 협력을 체결하며 다른 각도에서 공략에 나섰다. 핵심은 '원스톱 턴키 솔루션'이다. 메모리,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을 한 곳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기업은 전 세계에서 삼성전자가 유일하다. 브로드컴은 구글(Google)을 비롯한 빅테크 기업들이 사용하는 AI 가속기(ASIC)를 설계·생산하는 회사다. 삼성전자는 브로드컴의 차세대 AI 가속기에 HBM 기술을 제공하고, 2나노 이하 첨단 파운드리 공정과 첨단 패키징 솔루션까지 통합 지원한다.
이 협약은 특히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에 큰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브로드컴의 차세대 고속 데이터 통신용 반도체 솔루션 등 주요 제품 라인업에 2나노 이하 첨단 파운드리 공정을 적용한다. 또한 2나노 공정 기반 첨단 패키징 기술을 통해 고성능·고효율 AI 반도체 구현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 전영현 DS부문장은 "AI 시대에는 메모리, 로직, 첨단 패키징이 긴밀하게 통합된 반도체 솔루션이 중요하다"며 "브로드컴과의 협력을 확대함으로써 미래 AI 인프라 발전을 가속화하고 고객에게 더 큰 가치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이번 양산 출하를 계기로 2026년 HBM 매출이 2025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증언: "젠슨 황이 더 달라고 할 것"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흥미로운 발언을 남겼다. 엔비디아, 앤트로픽, 오픈AI, 브로드컴과 최근 논의한 결과, AI 고객들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메모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젠슨 황을 다음번에 만나면 '그 수치는 너무 낮았다, 나는 더 원한다'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고 언급했다. 엔비디아가 향후 5년간 필요하다고 예측한 메모리 물량조차 곧 상향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는 AI 시장의 성장 속도가 예측을 넘어서고 있음을 의미한다. 브로드컴 CEO 혹 탄도 최 회장에게 회사의 메모리 수요가 가용 공급량을 초과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 앤트로픽은 AI 모델 개발을 넘어 컴퓨팅 파워 구축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칩 가용성을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오픈AI는 막대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해 SK에 칩을 직접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앤트로픽은 한 발 더 나아가 자체 칩 설계 가능성까지 검토 중이다. 로이터(Reuters)는 지난 4월 앤트로픽이 자체 AI 칩 개발 초기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도했으며, 최근에는 제조 파트너로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협의 중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앤트로픽은 5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Micron)을 파트너로 명시한 자금 조달 발표에서 이들 기업의 기술이 메모리·스토리지·로직 칩 공급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첨단 AI 칩 설계에는 약 5억달러가 소요되지만, 칩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필수 투자로 판단하고 있다.
■ 5760억달러 투자 전략, 대체불가 공급망의 실체

한국 정부는 지난 6월 총 576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대규모 AI 반도체 전략을 발표했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세 가지 프로젝트로 구성된다. 서남권 신규 반도체 생산 거점 구축, 피지컬 AI 생태계 조성, 그리고 AI 데이터센터 프로젝트다. SK텔레콤은 여기에 발맞춰 울산을 시작으로 영남권에 2기가와트 이상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2035년까지 최대 15기가와트 규모의 전국 AI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을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과 생산 역량을 바탕으로 한국을 대체 불가한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국가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엔비디아, 브로드컴, 오픈AI, 앤트로픽 같은 글로벌 AI 리더들이 한국 없이는 차세대 AI 칩을 만들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2024년 6560억달러에서 2030년 1조2280억달러로 약 1.9배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AI 반도체(ASIC) 점유율은 올해 9.5%에서 2026년 19%로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HBM 시장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나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하반기 출하가 본격화되는 엔비디아의 베라 루빈이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분석했다.
■ 생태계 구축 경쟁, 한국이 선점한 자리
AI 산업은 지금 생태계 구축을 둘러싼 패권 경쟁 중이다. 안정적인 AI 운영과 독자적 개발을 위해서는 반도체 수급, 데이터센터, 에너지 인프라가 모두 뒷받침돼야 한다. 이번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한국 기업들이 맺은 협력안은 반도체 설계·제조부터 데이터센터 인프라, 피지컬 AI 로봇까지 산업 전반을 아우른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1위, HBM에서 압도적 점유율, 첨단 패키징 기술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했다. 여기에 SK텔레콤의 기가와트급 AI 데이터센터 구축과 현대차 그룹의 AI 로봇 개발 협력까지 더해지며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차 그룹은 엔비디아와 함께 대학과 스타트업의 AI 로봇 개발을 지원하는 플랫폼을 구축하기로 했다. CES 2026에서 현대차 그룹은 차세대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Atlas)를 세계 최초로 공개하며 피지컬 AI 시장 진출 의지를 명확히 했다.
이제 글로벌 빅테크들은 한국 없이는 AI 인프라를 완성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엔비디아의 베라 루빈 칩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HBM4 없이 성능을 발휘할 수 없고, 브로드컴의 AI 가속기는 삼성전자의 2나노 파운드리 없이 최적화되기 힘들다. 오픈AI와 앤트로픽은 컴퓨팅 파워 확보를 위해 한국 기업에 직접 공급을 요청하고 있다. '대체 불가'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다만 이번 협력안이 실제 투자와 계약 이행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정부는 관련 협약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회를 통과한 AI 데이터센터 특별법이 2027년 2월 시행되면 인허가 원스톱 처리, 타임아웃제, 비수도권 전력 계통 영향평가 면제 등의 인프라 구축 걸림돌이 크게 완화될 전망이다.
1390조원 규모의 동맹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단순 부품 공급자에서 AI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도약했음을 보여준다.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은 "한국이 AI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한국 없이 글로벌 AI 산업이 작동할 수 있을까"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답은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