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 5천억원. 2026년 대한민국 정부가 연구개발에 쏟아붓는 역대 최대 규모의 예산이다. 그런데 이 막대한 재원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눈에 띄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33개 부처가 나눠 쓰는 이 돈 중 무려 11조 9,119억원, 전체의 33.5%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 곳으로 집중된다는 점이다.

2위인 방위사업청의 5조 8,396억원, 3위 산업통상자원부의 5조 4,737억원을 합쳐도 과기정통부 하나에 미치지 못한다. 이런 쏠림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정부가 어디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느냐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
■ AI 예산만 9조 9천억, 전년 대비 3배 폭증
정부가 그린 미래의 중심에는 인공지능이 있다. 2026년 AI 관련 예산만 9조 9천억원. 전년 대비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 중 과기정통부가 담당하는 예산이 5조 1천억원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산업통상자원부 1조 7천억원, 중소벤처기업부 9천억원이 그 뒤를 잇는다.
정부는 2026년을 'AI G3 도약의 원년'으로 규정했다.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AI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를 위해 AI 컴퓨팅 자원 활용 기반 강화에 2조원대를 투입한다. 고성능 GPU 1만 5천장 이상을 확보해 연산 자원 부족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계획이다.
반도체와 양자기술도 전략 투자 분야로 꼽힌다. 2026년 정부는 10대 핵심 투자 분야를 선정했다. AI, 에너지, 반도체·양자·우주항공을 포함한 전략기술 분야가 그 중심이다. 과기정통부가 이 모든 분야의 사령탑 역할을 맡는다. 참고로 과기정통부 전체 예산은 R&D를 포함해 정보통신, 방송통신 등을 합쳐 23조 7,417억원 규모다.
■ 위축된 기초연구, 2조 7천억으로 복원 시도
정부 R&D 정책에는 또 다른 축이 있다. 기초연구다. 2026년 기초연구 예산은 전년 대비 17.1% 증가한 2조 7,362억원으로 책정됐다. 지원 과제 수는 28.2% 늘어난 1만 5,800여개다. 특히 신규 과제가 7천여개로 전년 대비 86.2% 급증했다.
정부가 기초연구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동안 R&D 예산 조정 과정에서 기초연구 생태계가 위축됐다는 현장의 목소리 때문이다. 중단됐던 생애기본연구 사업을 대신해 1,150억원 규모의 기본연구 사업을 복원하고, 약 2,000개 신규 과제를 지원한다. 초기 임용 교원, 경력 단절 연구자, 지방대 소속 연구자 등 연구 기반이 취약한 층에 대한 우대도 강화했다.
연구 기간도 확대됐다. 기존 1~3년 단기 연구 중심에서 최대 5년까지 늘어난다. 우수 과제에는 후속 연구를 최대 2회 추가 지원해 연구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최우수 연구자를 위한 리더연구 사업에는 연 16억원 규모의 탑티어 유형을 신설했다.
■ GDP 대비 5.13%, 세계 2위인데 성과는 글쎄
그러나 이렇게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한국 R&D는 끊임없이 비판받아왔다. 이른바 '코리아 R&D 패러독스'다.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5.13%로 이스라엘(6.35%)에 이어 세계 2위임에도, 경제적 성과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국회미래연구원은 정부 R&D 성과가 투자 규모에 비해 미흡하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30개가 넘는 부처가 파편적 관점에서 R&D를 추진하면서 거시적 국가 전략과의 정합성이 떨어지고, 사업 간 유사성과 중복 투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판의 근거가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최근 10년간 한국 R&D 활동 효과 분석 연구 100여편을 검토한 결과, 효율성 측면에서 특별한 부진은 발견되지 않았다. 논문 생산 효율성은 주요국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특허 생산 효율성은 주요국 대비 가장 우수한 편으로 나타났다.
■ 진짜 문제는 특허 활용률 22%
그렇다면 한국 R&D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말일까. 그건 아니다. 통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질적인 약점이 드러난다. 대학과 공공연구기관이 정부 R&D 예산의 73.7%를 사용하면서도, 보유 특허기술의 활용 비율이 22.1%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5건 중 4건은 활용되지 못하는 셈이다.

이는 대학과 공공연구기관이 사업화가 어려운 기초과학 중심 연구를 많이 수행하는 탓도 있다.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지식재산 경영 전략의 부재 때문이다. IP 경영 목표와 전략 수립은 활발한 반면, 실제 IP 창출-관리-활용 전반의 기반은 취약하다. IP 경영 인력의 전문성도 부족하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분석에 따르면 개선 방안은 명확하다. 수요 기반의 IP 창출 프로세스와 품질 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IP 심의위원회에 외부 위원을 확대해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단순 유지·포기 결정 위주의 진단에서 벗어나 IP 활용성을 고려한 가치평가로 전환해야 한다. 내외부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외부 전문가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 AI가 예산 중복 찾아낸다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부처 간 중복 투자를 해결하기 위해 2026년부터 'AI 예산심의 AI'를 도입했다. 국가 R&D 예산 심의 과정에서 AI가 회의록을 작성하고 부처 간 중복 사업을 찾아낸다. 또한 41개 부처 741개 AI 관련 사업 정보를 망라한 통합 설명 자료를 공개했다. 방대한 예산 정보 속에서 필요한 사업만 추출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제도 개선도 병행하고 있다. 예비타당성조사 폐지, 연구비 자율성 확대, 연구과제 중심제도 단계적 폐지 등이다. 연구자들이 자율성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장기·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 35조의 성패, 효율성이 가른다
2026년 35조 5천억원이라는 역대 최대 R&D 예산. 이 막대한 재원이 과연 한국 경제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과기정통부가 11조 9,119억원이라는 천문학적 R&D 예산을 쥔 이유는 명확하다. AI와 반도체, 양자기술로 대표되는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위축된 기초연구 생태계를 복원하며, 혁신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산과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연구 성과가 실제 산업 현장에서 활용되고, 경제적 가치로 전환되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특허 활용률 22%를 끌어올리고,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며, IP 경영 역량을 강화하는 일. 이 모든 것이 결국 효율성의 문제다.
GDP 대비 5.13%라는 세계 2위의 R&D 투자 비중을 자랑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투입이 아니라 산출이다. 35조원이 한국 경제의 생산성 대도약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2026년이 그 시험대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