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회사에 AI 에이전트가 몇 개나 있는지 모른다"
최근 국내외 대기업 CIO들과의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고백이다. 마케팅 부서는 구글 Vertex AI로 챗봇을 만들고, 영업팀은 마이크로소프트 Copilot Studio를 쓰고, IT 부서는 AWS Bedrock을 사용한다. 각 부서가 서로 다른 클라우드 플랫폼에서 제각각 AI 에이전트를 운영하면서 누가 어떤 AI를 어떻게 쓰는지 파악조차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29일 세일즈포스가 공개한 '뮬소프트 에이전트 패브릭(MuleSoft Agent Fabric)'은 바로 이 문제를 겨냥한다. 주목할 점은 AWS의 베드록, 구글 클라우드의 버텍스 AI,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파일럿 스튜디오까지 각 기업 플랫폼의 AI 에이전트를 자동으로 탐색하고 통합 관리한다는 것이다. 클라우드 업계에서 보기 드문 '중립 전략'이다. AWS, 구글, MS가 자사 생태계 안에서 AI 에이전트를 구축하고 운영하도록 유도할 때, 세일즈포스는 "어떤 클라우드를 쓰든 우리가 통합 관리해주겠다"며 플랫폼 중립적 입장을 선명히 한 셈이다.
'에이전트 스프롤' 현상이 기업을 위협한다
'에이전트 스프롤(Agent Sprawl)'이라는 용어가 최근 IT 업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과거 '데이터 사일로' 문제의 AI 버전으로, 부서와 팀 단위로 무분별하게 생성된 AI 에이전트들이 중앙 통제 없이 확산되는 현상을 뜻한다. IDC는 전 세계 AI 에이전트 수가 2029년까지 10억 개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는 2025년 대비 무려 40배 급증하는 규모다. 문제는 이 에이전트들이 AWS, 구글, MS 등 서로 다른 플랫폼에 분산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성SDS 인사이트 리포트는 '에이전트 스프롤'을 방지하기 위해 포괄적인 오케스트레이션 레이어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트너는 더 나아가 2028년까지 기업 보안 침해 사고의 25%가 AI 에이전트 남용에서 기인할 것으로 경고했다. 실제 기업들이 겪는 문제는 구체적이다. 어떤 AI 에이전트가 어떤 데이터에 접근하는지 추적이 불가능하고, 유사한 기능의 에이전트가 중복 운영되면서 클라우드 비용이 폭증한다. 각 에이전트의 권한과 데이터 접근 범위를 통제할 수 없어 보안 리스크가 커지고, AI 사용 내역을 감사하거나 규제 당국에 보고할 방법도 없다.
CIO Korea가 발표한 '2026년 CIO 10대 과제'에서도 에이전틱 AI를 핵심 워크플로우에 통합하면서 보안과 통제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세일즈포스 박세진 한국 대표는 "성공적인 AX(AI 전환)를 위해서는 단순히 고성능 AI 모델을 도입하는 것을 넘어, 파편화된 AI 자산들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제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경쟁사까지 품는 '적과의 동침' 전략

세일즈포스의 이번 전략은 역설적이다. AWS, 구글, MS는 클라우드 인프라 시장에서 세일즈포스와 경쟁 관계에 있다. 카날리스(Canalys) 2024년 4분기 데이터에 따르면 글로벌 클라우드 시장 점유율은 AWS 33%, MS 24%, 구글 11%로 이들 3사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일즈포스가 경쟁사 에이전트까지 통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기업 고객들이 이미 멀티클라우드 환경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CB인사이츠 분석에 따르면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는 모두 AI 에이전트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지만 각사의 접근법은 미묘하게 다르다. AWS Bedrock은 Anthropic, Cohere 등 다양한 외부 모델 파트너 지원에 집중하고, 구글 Vertex AI는 PaLM과 Gemini 등 자체 연구 모델이 강점이며, MS Copilot Studio는 GPT 기반 통합 생산성 도구를 중심으로 한다. 이처럼 파편화된 환경에서 세일즈포스는 "우리는 모든 플랫폼의 에이전트를 한곳에서 보여주겠다"는 차별화 전략을 택했다.
뮬소프트 에이전트 패브릭의 핵심은 세 가지 기능으로 요약된다. 먼저 '에이전트 스캐너(Agent Scanner)'는 AWS, 구글, MS 등 각 플랫폼에 배포된 AI 에이전트를 수작업 없이 자동으로 식별하고 등록한다. 에이전트의 역할, 사용 중인 AI 모델, 접근 가능한 데이터 범위까지 메타데이터를 수집한다. '에이전트 레지스트리(Agent Registry)'는 기업 내 모든 AI 에이전트와 MCP(모델 컨텍스트 프로토콜) 서버, AI 도구를 하나의 목록으로 통합하고 변경 사항을 실시간 반영한다. '에이전트 비주얼라이저(Agent Visualizer)'는 플랫폼별, 역할별, 기능별로 에이전트를 검색하고 비교할 수 있어 "마케팅 부서가 3개 플랫폼에서 유사한 챗봇을 중복 운영 중"이라는 식의 비효율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특히 구글 클라우드의 A2A(Agent-to-Agent) 프로토콜 표준을 지원해 서로 다른 플랫폼 간 상호 운용성을 보장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Anthropic의 MCP와 함께 AI 에이전트 표준화 경쟁에서 중요한 진전이다. MCP는 AI 에이전트들이 서로 다른 플랫폼과 도구를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USB-C'와 같은 표준이다. 과거 스마트폰 충전 단자 표준화 전쟁, 웹 브라우저 표준화 경쟁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표준을 선점한 기업이 생태계를 지배했듯이, AI 에이전트 세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플랫폼 싸움에서 통합 싸움으로
세일즈포스의 전략은 명확하다. AWS, 구글, MS가 "우리 플랫폼에서 AI를 쓰세요"라고 말할 때, 세일즈포스는 "어디서 쓰든 우리가 관리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클라우드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한다. 과거에는 "어느 클라우드가 더 좋은 AI 모델을 제공하는가"가 경쟁의 축이었다면, 이제는 "흩어진 AI 자산을 누가 더 잘 통합하고 관리하는가"가 새로운 경쟁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일즈포스가 2018년 65억 달러에 인수한 뮬소프트(MuleSoft)의 통합 기술이 이번 전략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비싼 인수"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AI 시대에 와서 그 가치가 재평가받고 있다. 뮬소프트는 원래 서로 다른 시스템과 애플리케이션을 연결하는 통합 플랫폼으로 출발했다. 이 기술이 이제 서로 다른 클라우드의 AI 에이전트를 연결하는 데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세일즈포스의 이번 발표는 한 가지 메시지를 분명히 한다. AI 시대의 승자는 가장 강력한 모델을 가진 기업이 아니라, 파편화된 AI 자산을 가장 효과적으로 연결하고 관리하는 기업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국내 기업들도 이미 멀티클라우드 환경에서 다양한 AI 에이전트를 운영 중이다. 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X, 카카오의 KoGPT, 그리고 글로벌 빅테크의 AI 모델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통합하고 관리할 것인가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 과제가 됐다.
AI 에이전트 시대의 비즈니스 모델 진화를 연구한 전문가들은 "에이전트 스프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AI 투자가 오히려 비용 증가와 보안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세일즈포스가 선보인 'AI 중립국' 전략이 시장에서 얼마나 받아들여질지, 그리고 AWS, 구글, MS가 어떻게 대응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분명한 것은 AI 관제탑을 누가 장악하느냐가 다음 10년 클라우드 패권을 결정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