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배터리 규정, '데이터·공급망' 대응에 수출 성패 달렸다

내년 2월 DBP 의무화…EV·산업용(2kWh 초과) 중심으로 '상시 검증 가능한 데이터' 요구
IBCT–SK AX, 배터리 여권 플랫폼 PoC 완료…데이터 구조 정합성·공급망 교환 운영 검증
실사(due diligence)는 내년 8월로 유예, 거버넌스·연계 운영 체계 구축 '역산' 필요
유럽연합(EU)가 배터리 전주기(원료–제조–유통–사용–회수·재활용)를 규율하는 EU 배터리 규정(EU Battery Regulation)을 예고하며 국내 배터리 밸류체인(소재·부품·셀·완성차·리사이클)의 대응 과제가 '규정 해석'에서 데이터 운영체계 구축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미지=젠스파크로생성)

유럽연합(EU)가 배터리 전주기(원료–제조–유통–사용–회수·재활용)를 규율하는 EU 배터리 규정(EU Battery Regulation)을 예고하며 국내 배터리 밸류체인(소재·부품·셀·완성차·리사이클)의 대응 과제가 '규정 해석'에서 데이터 운영체계 구축으로 이동하고 있다.

규정은 배터리를 단순 제품이 아닌 '지속가능성 규제 단위'로 보고, 탄소발자국·유해물질 제한·재활용원료·회수·재활용 강화와 함께 디지털 기반 추적성(배터리 여권)을 핵심 축으로 삼는다.

특히 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지점은 디지털 배터리 여권(Digital Battery Passport, DBP)이다. EU는 일정 범주의 배터리에 대해 QR 등 식별자를 통해 관련 정보에 접근 가능한 체계를 요구하며, 배터리 여권이 제품·공급망 데이터의 '접근성'과 '검증 가능성'을 전제로 설계됐다는 분석이 잇따른다.

배터리 여권은 '문서 제출'이 아니라 '상시 접근 가능한 디지털 증빙'

배터리 여권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 라벨링을 넘어선다. 유럽 정책 분석에서는 배터리 여권이 탄소발자국 등 핵심 지속가능성 정보와 연계되며, 순환경제·재사용·재활용 의사결정까지 지원하는 인프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본다. 즉 기업이 준비해야 할 것은 '필요할 때 서류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품질·자재·공급망 시스템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를 여권 항목에 맞춰 정합성 있게 구조화하고, 외부 파트너와 교환·검증 가능한 형태로 운영하는 체계다.

IBCT–SK AX PoC가 보여준 현실 과제: 데이터 정합성 + 공급망 교환 운영

IBCT의 제조 공급망 데이터 플랫폼 '인피리움(Infirium)'을 활용한 이번 검증은 배터리 제조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하고, 이를 EU 배터리 규정이 요구하는 여권 데이터 형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미지=IBCT)

이런 흐름 속에서 9일 데이터 스페이스 전문기업 IBCT는 SK AX와 함께 배터리 여권 플랫폼 실증(PoC)을 진행하고, EU 규제 대응을 염두에 둔 데이터 구조 검증과 운영 시나리오 점검을 마쳤다고 밝혔다.

양사는 지난해 9월 맺은 제조 데이터 생태계 협력 협약을 토대로 이번 실증 작업을 수행했다. 내년 2월 시행되는 디지털 배터리 여권 제도를 앞두고, 실제 제조 현장에서 생성되는 데이터가 EU의 규제 틀에 부합하는지 사전 점검하는 데 목적을 뒀다.

IBCT의 제조 공급망 데이터 플랫폼 '인피리움(Infirium)'을 활용한 이번 검증은 배터리 제조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하고, 이를 EU 배터리 규정이 요구하는 여권 데이터 형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IBCT는 "이번 실증에서 배터리 여권에서 요구되는 핵심 항목과 실제 제조 데이터의 연결 가능성, 그리고 데이터 구조의 정합성 확보 여부를 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업계가 특히 어려움을 토로하는 지점은 '플랫폼 구축' 자체보다 공급망 참여자 간 데이터 교환이 실제로 굴러가느냐다. 배터리 여권은 부품사–배터리 제조사–완성차(OEM)로 이어지는 다층 공급망에서 데이터가 흐르고, 그 데이터가 일정 수준의 품질과 책임 체계를 갖춰야 의미가 생긴다. IBCT는 이번 실증이 바로 이 부분—데이터 커넥터 기반 교환 운영 환경과 공급망 연계형 운영 시나리오—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강조했다.

실제 산업 구조를 반영해 부품 공급사에서 배터리 제조사, 그리고 최종 완성차 업체로 이어지는 데이터 흐름을 재현하는 시나리오도 검증 대상에 포함됐다. 글로벌 배터리 기업 SK온과 부품 제조사 일광엠씨티가 참여해 실제 배터리 및 부품 정보를 기반으로 여권 교환 파일럿을 수행하며, 다자 간 데이터 연계의 실현 가능성을 점검했다.

이번 실증에 사용된 인피리움은 유럽 자동차 산업의 데이터 표준인 카테나엑스(Catena-X) 인증을 획득한 플랫폼이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는 제조기업들이 공급망 데이터를 연결하고, 디지털 제품 여권(DPP)과 배터리 여권(DBP)을 발행하며, EU 규제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IBCT는 이번 실증 결과를 바탕으로 폭스바겐, BMW를 비롯한 글로벌 완성차 제조사들이 제시하는 배터리 여권 요구사항을 지속 분석하고, 플랫폼 기능을 정교화할 계획이다.

이정륜 IBCT 대표는 "이번 PoC는 인피리움 플랫폼의 EU 규제 대응 역량과 공급망 연계 운영 기술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글로벌 제조기업과의 협업을 확대해, 복잡한 공급망 환경에서도 배터리 여권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업계 대응 필요성 3가지… '운영체계'가 관건

EU 배터리 규정 대응은 법무·규제팀만의 문서 작업이 아니라, 제조·품질·IT·구매·물류·ESG가 함께 만드는 운영 과제다. 현장에서 병목이 되기 쉬운 쟁점은 데이터 구조 정합성(Structure & Semantics), 공급망 교환 운영(Interoperability & Governance), 검증 가능성(Auditability) 등이다. (이미지=젠스파크로 생성)

EU 배터리 규정 대응은 법무·규제팀만의 문서 작업이 아니라, 제조·품질·IT·구매·물류·ESG가 함께 만드는 운영 과제다. 현장에서 병목이 되기 쉬운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데이터 구조 정합성(Structure & Semantics)이다. 여권 항목은 "어떤 데이터를 갖고 있느냐"보다 "그 데이터를 어떤 구조·정의·단위로 관리하느냐"가 핵심이다. 공장(MES)·전사(ERP)·제품(PLM)·품질(QMS)로 흩어진 데이터를 여권 항목에 맞게 연결하려면, 용어·코드·단위 체계부터 정리해야 한다.

둘째, 공급망 교환 운영(Interoperability & Governance)이다. 여권이 작동하려면 다자 간에 데이터가 흐르고, 누가 어떤 범위의 데이터를 제공하는지, 어떤 수준으로 검증하는지, 접근권한은 어떻게 부여하는지, 오류 발생 시 책임은 누가 지는지 같은 운영 규칙이 필요하다. '데이터를 공유하라'는 요구는 결국 거버넌스 합의를 요구한다.

셋째, 검증 가능성(Auditability)이다. EU는 배터리 여권을 포함한 디지털 정보 제공을 통해 지속가능성 정보를 '접근 가능하게' 만들고, 순환경제를 촉진하겠다는 방향성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때 기업은 데이터 변경 이력, 출처, 승인 프로세스까지 포함한 '감사 가능한 데이터' 체계를 갖추지 못하면 납품·인증 과정에서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

실사(due diligence)는 유예됐지만…DBP 준비 시간은 늘지 않았다

한편 EU는 배터리 규정 중 공급망 실사(due diligence) 의무 적용 시점을 늦추는 'stop-the-clock' 조치를 채택해 기업에 추가 대응 시간을 부여했다. 유럽이사회는 배터리 실사 규칙 적용을 연기하는 법을 채택했다고 발표했다.

다만 이는 실사 의무의 일정 조정에 가깝다. 배터리 여권을 포함한 디지털 추적성·정보 제공 요구는 별도의 준비가 필요하며, 업계에서는 실사 유예와 무관하게 올해부터 데이터 정합성–교환 운영–검증 체계를 역산해 구축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체크리스트: 배터리·부품·소재 기업이 지금 시작해야 할 것

업계 실무 관점에서 당장 필요한 준비 과제는 명확하다.

>대상·범위 확정: 자사 제품이 어떤 배터리 범주에 해당하는지, 어떤 정보 제공·디지털 체계 요구를 받는지 조기 확정

>데이터 맵핑: 생산·품질·자재·물류 데이터가 여권 항목으로 변환되는 데이터 모델과 정의(용어·단위·코드)를 표준화

>공급망 거버넌스 설계: 제공 범위·접근권한·책임소재·검증 프로세스(누가 무엇을 '증명'하는가) 합의

>교환 운영 실증: 파트너와 실제 데이터 교환 시나리오를 돌려 병목(정합성·권한·품질·속도)을 조기에 제거

EU 배터리 규정은 이제 '친환경'이라는 선언적 목표를 넘어, 데이터로 증명되는 지속가능성을 시장 접근의 전제조건으로 바꾸고 있다. 배터리 여권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다. 업계가 준비해야 할 것은 새로운 서류 양식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가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만들고 흘려보내는 운영체계 그 자체다.

황정호 기자

jhh@tech4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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