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 CEO들 "AI 속도 늦추자" 한목소리…트럼프는 "이기는 자가 승자" 선긋기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를 비롯한 빅테크 AI 리더들이 일제히 "AI 개발 속도를 늦추자"는 데 뜻을 모으며 업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발단은 아모데이가 지난 12일(현지시간) 블로그에 올린 3900여 단어의 에세이 "We Must Pace the Frontier(우리는 프런티어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였다. 그는 AI 모델의 역량 발전 속도를 늦춰야 한다며, 첫 조치로 독립 평가기관에 자사 시스템에 대한 직원급 상시 접근권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훈련·배포 전 과정을 상시 감시하고 안전 조치 준수 여부를 검증하도록 한다는 것으로, 사실상 외부 감시기구를 사내에 상주시키겠다는 파격적 제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곧바로 "속도 조절에 동의한다"며 동일한 접근권 제공을 약속했고,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와 머스크까지 잇달아 지지하면서 하루 만에 업계 전반의 공감대가 형성된 듯 비쳐졌다.

그런데 워싱턴포스트가 14일(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을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앤트로픽·오픈AI·구글은 이미 지난 7월부터 업계 주도의 새 AI 안전기구 설립을 위한 비공개 실무 협의를 이어왔다는 것이다.

출발점은 허사비스가 7월 14일 제안한, 미국 증권업계를 규율하는 FINRA(미국금융산업규제기구)를 본뜬 '프런티어 AI 스탠더드 바디' 구상이었다. 이번 주말의 공개 선언은 새 움직임이라기보다, 두 달 가까이 물밑에서 이어져 온 협의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에 가깝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다만 3사의 온도차는 뚜렷하다. 앤트로픽은 정부와의 파트너십에, 오픈AI는 자율적인 업계 표준과 개별 주(州) 단위 입법 지지에 가깝다. 코히어 에이단 고메즈 CEO는 거대 기업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면 군소 경쟁사가 불리해질 수 있다며 견제구를 던졌다.

정치권, 특히 백악관 반응이 더 날 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AI에서 이기는 쪽이 결국 이긴다"며 속도조절 요구에 선을 그었다. 대통령 과학기술자문위원회 공동의장이자 전 백악관 AI·암호화폐 자문역인 데이비드 색스는 속도를 늦추려는 동기가 순전히 이타적이라고 포장하지 말라며, AI 기업들이 소송 리스크를 피하려는 상업적 계산도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이를 "냉전식 플레이북"이라고 깎아내렸다.

정리하면 AI 3사의 '안전 공조' 프레임과 'AI 패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없다'는 백악관·의회의 프레임이 정면충돌하는 양상이다. 실제 규제로 이어질지는 11월 3일 중간선거 이후 미국 정치 지형에 달려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시장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14일(현지시간) 뉴욕증시에서 엔비디아는 장중 3%대, 인텔은 7%, AMD는 6%대 하락하는 등 반도체주가 일제히 밀렸고, 나스닥종합지수도 1%대 하락 마감했다. AI 업계 리더들의 속도조절 발언이 데이터센터·AI 인프라 투자 둔화 우려로 번지며 반도체 관련주에 매물이 집중됐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파장은 국내 증시로도 번졌다. 14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3.26% 급락한 6684.37에 거래를 마쳤는데, 낙폭이 온전히 AI 속도조절론만의 결과는 아니었다. 미국의 8월 근원 소비자물가(CPI)가 예상치(0.2%)를 웃돈 0.3%로 나오며 금리인상 우려가 재점화됐고, 국제유가(브렌트유)도 배럴당 108달러를 재돌파하며 겹악재로 작용했다는 게 증권가의 공통된 분석이다. 외국인 3조9000억원, 기관 1조7000억원 규모의 매도에 지수가 끌려 내려갔고, 삼성전자는 4%대, SK하이닉스는 6~7%대 하락하며 낙폭을 주도했으며 SK스퀘어·삼성전기도 각각 7~8%대, 5%대 안팎의 약세를 보였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급락을 확대 해석하는 데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이번 논의가 AI 개발 중단이 아니라 속도·안전성 검증 조절에 가까우며,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여전히 공급 부족인 만큼 이날 하락은 실적 악화보다 투자심리 위축에 따른 것이라고 짚었다. 하이퍼스케일러의 설비투자(캐펙스) 가이던스 하향이나 메모리 수요 부진으로 이어질지가 향후 관전 포인트다.

역설적인 장면도 같은 날 벌어졌다. 아모데이의 속도조절 주장에 동의한 바로 그날, 머스크는 X에서 그록 4.8이 AGI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묻는 질문에 "그건 그록5가 될 것"이라고 짧게 답했는데, 확정적 선언이라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한 줄짜리 답변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이어진 게시물에서도 "어쩌면 무엇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정도로 조심스럽게 표현했을 뿐, 벤치마크나 출시 일정은 제시하지 않았다. 머스크는 2조5000억 개 매개변수 규모의 새 C++ 스택 기반 그록4.8이 이번 주 학습을 마치고 강화학습 단계로 넘어간다고 밝혔고, 아직 출시되지 않은 그록4.7은 "앤스로픽 오푸스 5.1급은 아니고 5.0 정도"라며 스스로 낮춰 평가했다.

'속도를 늦추자'는 목소리에 동의하면서도 AGI 모델 라인업을 예고하는 상반된 조합은, 속도조절론이 실제 개발 경쟁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을지 근본적인 의문을 남긴다. AGI라는 용어 자체가 업계 내 합의된 정의가 없는 데다 머스크의 발언도 가능성 언급에 가까웠던 만큼, 실제 벤치마크 공개 시점이 진위를 가늠할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안은 국내 AI 생태계에도 확인해야 할 대목을 남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HBM 공급사의 주가와 수주에 속도조절론이 실질적 영향을 줄지, 아니면 일시적 심리 요인에 그칠지는 향후 빅테크 실적 발표와 캐펙스 가이던스로 확인해야 한다. 그록4.8·그록5의 벤치마크가 공개되면 하이퍼클로바X·엑사원 등 국내 LLM과의 기술 격차도 함께 점검할 필요가 있다.

정재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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