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가 스타트업의 조직과 개발 방식을 바꿨다면 그다음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렇게 만들어진 스타트업 가운데 투자자는 어디에 돈을 넣을 것인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개발과 디자인, 기획의 비용을 낮추면서 과거에는 상당한 인력과 자본이 필요했던 제품도 작은 팀이 빠르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됐다. 하지만 ‘만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시대도 함께 지나가고 있다. 기술의 진입장벽이 낮아질수록 투자자의 시선은 오히려 시장에서 무엇을 증명했는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성장했는지, 그리고 그 사업을 이끄는 창업자가 어떤 사람인지로 이동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글로벌 스타트업 축제 ‘트라이 에브리싱(Try Everything) 2026’ 첫날 Connection Stage의 ‘Industry Trends & Insights’ 세션에서는 스타트업 대표들이 AI가 조직과 업무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바로 이어진 토론에서 질문의 방향은 투자시장으로 옮겨갔다. ‘투자 트렌드 분석 Part 2. 넥스트 유니콘을 찾아서’ 토론은 그렇게 “그렇다면 돈은 어디로 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투자시장 온기 돌아도 양극화…‘얼마나 효율적으로 컸나’가 새 잣대

이날 토론에는 배상승 뉴패러다임인베스트먼트 대표, 이인성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벤처스튜디오 그룹장, 김지웅 카카오벤처스 이사가 참석했다. 뉴패러다임인베스트먼트와 블루포인트파트너스는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육성하는 투자사이며, 카카오벤처스 역시 프리시드·시드 단계에서 팀을 중심으로 투자하는 얼리스테이지 벤처캐피털(VC)이다. 서로 다른 투자 철학과 전문 영역을 가진 세 사람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였다.
첫 번째 질문은 현재 스타트업 투자시장의 온도를 진단하는 것이었다. 2022년 이후 이어진 유동성 위축에서 벗어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지만, 세 투자자가 바라본 시장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특히 자금을 비교적 쉽게 확보하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의 격차가 더 뚜렷해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와 관련해 이인성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벤처스튜디오 그룹장은 “과거 개발 역량 자체가 희소했던 시기와 지금은 투자자가 보는 기준도 달라졌다”며 말을 이어갔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투자시장이 점점 더 양극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몇 년 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역량이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시장에 더 빨리 접점을 만들고 실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팀을 찾게 됩니다.”

투자시장 회복에는 스타트업 자체의 성장뿐 아니라 투자금이 회수돼 다시 시장으로 들어오는 구조도 영향을 미친다. 배상승 뉴패러다임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초기 기업 투자부터 기업공개(IPO)와 투자회수까지 이어지는 자본시장의 순환을 함께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자본시장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초기 기업에 투자해 상장까지 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후 투자자들이 회수한 자금이 다시 후속 투자와 신규 투자 재원으로 연결돼야 합니다. 그런데 기업가치가 낮아지고 투자회수가 어려워지면 초기 투자자들도 자연스럽게 투자에 소극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본시장에서 기업가치와 투자회수가 개선돼야 초기 스타트업 시장까지 선순환이 빨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AI는 이 변화에 또 하나의 변수를 더하고 있다. 김지웅 카카오벤처스 이사는 현재 투자시장을 ‘과도기’이자 ‘양극화의 시기’로 규정했다. AI가 콘텐츠 제작 등 여러 영역의 비용을 낮췄지만, 비용 절감이 실제 추가 생산이나 성장으로 얼마나 이어졌는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검증 사례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섹터별 온도차도 커지고 있다. 일부 AI 관련 분야처럼 투자자의 관심이 몰리는 영역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산업은 여전히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초기 투자자 역시 단순한 성장 속도보다 제한된 자원으로 얼마나 효율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기 시작했다.
AI·콘텐츠·에너지…투자자들이 보는 3~5년 뒤 기회는

토론은 앞으로 3~5년 안에 유니콘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분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세 투자자가 동일한 산업을 지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AI 활용 역량 자체를 기업 경쟁력으로 보는 시각부터 콘텐츠 소비 방식의 변화, 반드시 풀어야 하는 산업 문제까지 서로 다른 투자 가설이 제시됐다.
배 대표의 경우는 AI를 특정 산업 하나로 한정하기보다 창업팀 전체의 생산성을 바꾸는 역량으로 바라봤다. 창업자와 조직이 AI를 활용해 고객과 시장, 경쟁사를 분석하고 제품과 서비스를 개선하면서 시간과 비용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가 향후 기업가치에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한편 콘텐츠 분야를 주로 살펴온 김 이사는 이용자가 쓰는 ‘시간’을 중심으로 시장 변화를 바라봤다. 게임 이용자가 사라졌다기보다 쇼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AI 캐릭터 등으로 여가시간을 재분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저는 요즘 ‘게임에서 어텐션으로’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용자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여가시간을 게임과 쇼츠, OTT, AI 캐릭터 같은 여러 포맷에 다시 나눠 쓰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 실시간형과 관계형 영역에서는 AI가 비용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없었던 시장까지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AI 캐릭터와 만들어진 관계가 라이브로 이어지고, 다시 커머스로 연결되는 흐름이 앞으로 3~5년 동안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AI로 콘텐츠 생산 비용이 급격히 낮아지면서 정반대의 기회도 생기고 있다. 김 이사는 저품질 AI 생성물이 대량 생산되는 이른바 ‘AI 슬롭(AI slop)’이 늘어날수록 이용자에게 좋은 콘텐츠를 골라주는 큐레이션 기술과 브랜드의 가치가 커질 가능성도 언급했다.

반면 블루포인트파트너스의 시선은 딥테크로 향했다. 이 그룹장은 AI를 통해 효율이 향상되는 산업이 많지만, 단순한 효율 개선을 넘어 사회와 산업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도 큰 투자 기회가 존재한다고 봤다.
“저희는 딥테크 기업에 많이 투자하고 있고 내부에서는 이런 창업팀을 ‘위대한 도전을 하는 회사’라고 표현합니다. AI로 효율이 높아지는 영역도 중요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고 꼭 해결돼야 하는 영역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중 하나가 에너지라고 보고 있습니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가 반복돼야 하는 분야지만 앞으로 3~5년 안에 이런 영역에서 큰 기업이 나올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세 투자자의 전망은 엇갈렸지만 한편으로 공통점도 있었다. 단순히 현재 가장 많은 투자가 몰리는 산업을 따라가기보다 AI로 새로운 생산성을 만들어내는 기업, 기존에 없던 사용자 행동을 만들어내는 기업, 그리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에 오랫동안 도전하는 기업에서 다음 성장 기회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만드는 건 누구나 한다”…결국 다시 ‘사람과 시장’
그렇다면 수많은 투자 제안서 가운데 실제 투자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토론 후반부에는 논의의 중심이 산업과 기술에서 창업자와 팀으로 이동했다.
김 이사는 짧은 IR만으로 창업자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전 경력과 사업 과정, 함께 일한 사람들의 평가까지 장기간 확인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투자 검토 과정에서는 과거 상사와 고객, 팀원 등을 통한 레퍼런스 체크나 팀원 인터뷰도 활용한다. 대표가 말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함께 일한 사람들의 경험에서도 같은 모습이 확인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김 이사가 또 하나 중요하게 보는 것은 실패를 다루는 방식이다.
“투자자들이 실패하는 팀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하더라도 그걸 자산으로 쌓아가는 팀을 좋아하고, 실패로 그냥 끝나는 팀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다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면서 무엇 때문에 실패했고 무엇을 확인했는지 데이터를 남기는 과정 자체가 회사의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그런 경험을 계속 쌓은 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안에 살아 있는 경험과 레퍼런스가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이 그룹장은 창업자의 ‘메타인지’를 투자 판단에서 중요하게 보는 요소로 꼽았다.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창업자보다 자신이 어디까지 고민했고 무엇을 아직 모르는지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이 오히려 매력적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이 그룹장은 최근 접하는 IR 자료의 제목과 구성, 표현이 지나치게 비슷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AI는 투자자를 설득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생성형 AI를 활용해 문서를 만드는 일이 흔해지면서 IR 자료의 제목과 구성, 표현까지 서로 닮아가고, 정작 왜 이 창업자가 이 문제를 풀려고 하는지를 보여주는 고유한 이야기는 희미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 그룹장은 “AI를 활용하더라도 각 팀만의 스토리와 진정성이 드러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기술을 만드는 능력만큼이나 시장에서 그것을 팔고 조직을 운영하는 능력도 중요함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배 대표는 기술적 우위나 최초라는 수식어만으로 사업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봤다.
“창업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가운데 첫 번째는 저는 영업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이 세계 최고이고 경쟁사보다 먼저 출시했다는 데만 집착하면 실제 사업에서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내부 팀과 고객,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는 소통력과 시장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 그리고 현금흐름을 예측하고 관리하는 재무 역량도 필요합니다. 영업력과 소통력, 시장 이해, 재무관리 이 네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지속 가능한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장 질의응답에서 이 그룹장은 이 변화의 본질을 한층 더 선명하게 설명했다. 이제는 제품을 만들지 못해서 시장에 내놓지 못하는 시대가 아니며, 비슷한 제품을 누군가는 이미 만들고 팔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얼마나 빠르게 시장에 접근하고 고객을 확보하며 사업을 실행하는지가 창업팀의 경쟁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앞선 세션에서 스타트업 대표들이 말한 AI 네이티브 조직의 변화와 이날 투자자들의 이야기는 결국 같은 지점에서 맞닿았다. AI가 작은 조직의 실행력을 키우고 제품을 만드는 비용을 낮추면서, ‘만들 수 있다’는 능력 자체는 점차 기본 조건이 되고 있었다.
투자자의 질문도 그래서 달라지고 있다. 얼마나 화려한 AI 기술을 갖췄는지가 아니라 제한된 자원으로 무엇을 증명했는지, 시장과 고객을 얼마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실패를 다음 실험의 자산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묻는다. AI가 기술의 진입장벽을 낮출수록 ‘넥스트 유니콘’을 가르는 기준은 역설적으로 다시 사람과 시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