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봉지 5개 넘긴 날, 당신의 몸에서 일어난 일

  • 50년간 남성호르몬 절반으로…호르몬 변화가 부른 약의 연쇄반응
  • 골든타임 놓치면 10년 후회, 약 섞어 먹다 생긴 부작용의 실체
2022년 국회 자료를 보면 두 달 이상 10가지 넘는 약을 먹는 사람이 113만 명이다. 그 중 65세 이상이 90만 명이다. OECD 공개자료를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75세 이상 고령자 중 70.2퍼센트가 3개월 이상 5개 넘는 의약품을 만성적으로 복용한다.
우리 몸의 변화는 누구나 '골든타임'이 존재한다. (사진=생성형 AI)

2022년 국회 자료를 보면 두 달 이상 10가지 넘는 약을 먹는 사람이 113만 명이다. 그 중 65세 이상이 90만 명이다. OECD 공개자료를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75세 이상 고령자 중 70.2퍼센트가 3개월 이상 5개 넘는 의약품을 만성적으로 복용한다. 자료를 제출한 OECD 7개국 평균이 48.3퍼센트인 것과 비교하면 월등히 높다.

질병관리청은 하루 5가지 이상 약을 복용하는 걸 다약제 복용이라 정의한다. 문제는 약이 많아질수록 부작용 위험도 커진다는 점이다. 외국 연구를 보면 노인이 병원에 입원하는 원인 가운데 10명 중 2명은 약 부작용과 관련이 있다. 약 부작용은 노인 입원 원인 5위다.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보고서를 보면 65세 이상이 5가지 이상 약을 먹을 경우 4가지 이하 복용군에 비해 입원 위험이 18퍼센트, 사망 위험이 25퍼센트 늘어난다.

약이 늘어나는 건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만은 아니다. 몸속에서 호르몬이라는 화학신호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여러 질환이 동시에 터지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보면 당뇨병, 심장질환, 대뇌혈관질환 같은 기저질환을 가진 경우 다약제 복용 비율이 높았다. 전체 인구는 만성신부전 18.38퍼센트, 심장질환 15.36퍼센트, 대뇌혈관질환 13.86퍼센트 순이었고, 노인의 경우 만성신부전 23.80퍼센트, 심장질환 20.97퍼센트, 대뇌혈관질환 18.31퍼센트로 그 비율이 더 높았다.

■ 50년 사이 남성호르몬 54퍼센트 감소

지난해 7월 런던에서 열린 유럽 인간생식배아학회 연례 학술대회에서 이스라엘 히브리대 하가이 레빈 교수팀이 발표한 연구가 충격을 줬다. 1972년부터 2019년까지 이스라엘, 미국, 브라질, 핀란드, 덴마크 등 5개국 남성 11만8593명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추적한 종단연구 6편을 메타분석한 결과, 평균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54퍼센트 감소했다. 특히 2000년 이후 감소 속도가 더 빨라졌다.

테스토스테론은 정자 생성과 성욕 조절뿐 아니라 근육량과 골밀도를 높이고 신진대사와 기분, 에너지 수준에도 영향을 준다. 레빈 교수는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50퍼센트 이상 감소하는 등 남성 생식 건강에 큰 위기가 닥쳤지만 현재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비만과 당뇨병, 가정용품에서 나오는 내분비 교란 화학물질, 지구 온난화 같은 환경 요인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폐경을 전후로 에스트로겐이 급감하면서 혈관 탄력이 떨어지고 혈압이 오른다. 뼈가 약해지면서 골다공증 위험이 커진다. 안면홍조와 야간 발한, 수면 장애도 이 시기에 몰려온다. 밤에 자주 깨고 새벽에 눈이 떠지는 것도 수면 호르몬 멜라토닌과 생체시계가 변하기 때문이다.

영국 일반의 바박 아슈라피는 최근 매체 인터뷰에서 "예전과 똑같이 먹는데도 살이 찐다면 근육량 감소로 인한 에너지 소비 감소가 원인"이라며 "이는 호르몬 변화와 밀접하다"고 설명했다. 근육이 줄면 기초대사량이 낮아지고 활동량까지 줄면 체중은 더 쉽게 늘어난다.

■ 폐경 후 5년이 골든타임

그럼 줄어든 호르몬을 보충하는 치료는 어떨까. 과거엔 호르몬 치료가 유방암과 심혈관 질환 위험을 높인다는 대규모 연구 때문에 외면받았다. 하지만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 등을 통해 안전성이 재평가되고 있다. 현재 쓰이는 바이오아이덴티컬 제제는 우리 몸의 호르몬과 구조가 같아서 과거 합성 호르몬보다 안전하다.

핵심은 시작 시기다. 내분비내과 전문의들은 폐경 직후 5년 이내, 60세 이전에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고 안전하다고 본다. 이 시기를 골든타임이라 부르는 이유는 심혈관 질환 위험이 증가하지 않으면서도 뼈 건강과 갱년기 증상 완화 효과를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단기, 즉 5년 내외로 복용하면 골다공증 예방 효과를 얻지만 10년 이상 장기 복용하면 부작용 가능성이 있어 주기적 검진이 필수다.

남성은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3.5ng/mL 미만이고 성욕 저하, 피로, 우울감, 근력 감소 등이 있을 때 호르몬 치료를 고려할 수 있다. 다만 생활습관 개선이 먼저다. 규칙적인 근력 운동과 충분한 수면, 스트레스 관리만으로도 호르몬 수치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

■ 약통 속 지뢰, 상호작용의 함정

문제는 호르몬 변화로 생긴 질환을 치료하다 보면 약이 자꾸 늘어난다는 점이다. 고혈압약과 당뇨약을 먹고 거기에 관절염 진통제와 영양제까지 더하면 약물 상호작용 위험이 기하급수로 커진다.

이부프로펜이나 나프록센 같은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는 혈압약 효과를 떨어뜨린다. 감기약에 들어 있는 슈도에페드린 같은 비충혈제거제도 혈압을 올릴 수 있다. 미국 워털루대 연구팀이 컴퓨터 모델링으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일부 고혈압약, 특히 이뇨제와 레닌-안지오텐신계 억제제를 복용하는 사람이 이부프로펜을 함께 먹으면 급성 신부전 위험이 커지고 간혹 영구적인 신장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전립선비대증 치료제는 혈압약과 함께 먹으면 혈압이 과도하게 떨어져 어지러움이나 낙상 위험을 높인다.

당뇨 환자는 더 조심해야 한다. 부신피질호르몬제인 프레드니솔론이나 덱사메타손은 혈당을 올리고, 히드로클로로티아지드 같은 티아지드계 이뇨제도 마찬가지다. 베타차단제는 저혈당 위험을 높일 뿐 아니라 빈맥이나 떨림 같은 저혈당 증상을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클래리트로마이신이나 설파메톡사졸, 플루오로퀴놀론계 항생제도 저혈당을 유발할 수 있다.

영양제도 예외가 아니다. 칼슘과 철분은 서로 흡수를 방해하므로 최소 2시간 간격을 두고 먹어야 한다. 고용량 비타민 D는 티아지드계 이뇨제와 상호작용해 체내 칼슘 배출을 막고 혈중 칼슘 농도를 과도하게 높일 수 있다. 항응고제인 와파린을 먹는 사람이라면 비타민 K가 많은 브로콜리, 시금치, 양배추를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약효가 떨어진다. 다만 비타민 K를 무조건 피할 필요는 없고 일정한 양을 꾸준히 먹는 게 중요하다.

오메가-3는 혈압을 낮추는 효과가 있어 혈압약과 함께 먹으면 과도한 혈압 강하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현재까지 심각한 부작용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그래도 주치의와 상담 후 복용하는 게 안전하다.

■ 살아남기 위한 네 가지 원칙

전문가들은 다약제 복용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네 가지 원칙을 권한다.

먼저, 여러 질병을 동시에 관리해 줄 주치의 한 명을 정한다. 여러 병원을 오가며 각기 다른 의사에게 처방받다 보면 중복 처방이나 약물 상호작용을 놓치기 쉽다. 단골 약국을 정해 모든 처방을 한 곳에서 조제하고 약사 설명을 듣는 것도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이다.

또한, 진료 시에는 처방약뿐 아니라 일반의약품, 비타민, 영양제, 한약까지 현재 복용 중인 모든 걸 의사와 약사에게 알린다. 새로운 약을 처방받을 땐 약 이름, 효능, 용법, 부작용, 상호작용, 주의해야 할 음식까지 구체적으로 묻는 습관이 필요하다. 또한 의약품 안전사용 서비스, 즉 DUR을 활용한다. 우리나라는 병원과 약국에서 병용 금기 약물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홈페이지나 앱을 이용하면 스스로도 점검할 수 있다.

집에 복용 약 목록을 만들어 보관하고 병원 방문 시 가져가는 것도 추천한다. 알람이나 약 수첩, 요일별 약 상자 등을 쓰면 복용을 잊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임의로 약을 끊거나 용량을 조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증상이 좋아졌다고 해서 마음대로 약을 중단하면 오히려 상태가 악화될 수 있다. 약을 추가하거나 바꾼 후 평소와 다른 증상이 나타나면 즉시 의료진에게 알려야 한다.

■ 관리는 선택이다

50대 이후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그 변화를 방치하면 만성 질환이 쌓이고 약의 개수는 늘어나며 결국 삶의 질은 떨어진다. 호르몬 치료가 필요한지, 약을 줄일 수 있는지, 영양제는 언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하다. 연령 증가에 따라 다약제 복용자 수와 비율도 증가한다. 65세 이상 다약제 복용자는 10.26퍼센트였으나 85세 이상의 경우 15.74퍼센트로 더 높았다. 나이 든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 늙어갈지는 선택할 수 있다.

김광우 기자

kimnoba@tech4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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