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강국 명함도 못 내민 日本"…그들이 선택한 반격의 칼날

  • 10조 엔 쏟는 '피지컬 AI'로 고령화 쓰나미 막는다
  • 2nm 반도체 속도전에 소프트뱅크·라쿠텐까지 총동원
지난 6월, 일본 아이치현 스카이엑스포. 4년째 열린 '로봇 테크놀로지 재팬'에 한 번도 없던 풍경이 펼쳐졌다. 농구공을 집어 든 토요타의 AI 로봇 '큐7'이 3점 슛을 성공시키는 순간, 관람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도요타의 휴머노이드 로봇 ‘큐7’. (사진=유튜브 캡처)

지난 6월, 일본 아이치현 스카이엑스포. 4년째 열린 '로봇 테크놀로지 재팬'에 한 번도 없던 풍경이 펼쳐졌다. 농구공을 집어 든 토요타의 AI 로봇 '큐7'이 3점 슛을 성공시키는 순간, 관람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옆 부스에선 가와다 로보틱스의 양팔 휴머노이드 '넥스테이지'가 컨베이어 벨트에서 물건을 집고 포장하는 작업을 쉬지 않고 반복했다. 재난 구조용 로봇 '칼레이도'는 화재를 진압하고 쓰러진 선반을 세워 안전 공간을 확보하는 시연까지 선보였다.

산업용 로봇만 전시해 온 이 행사가 올해 처음으로 휴머노이드를 무대에 올린 건 우연이 아니다. 챗GPT 돌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생성AI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와중에도, 일본은 조용했다.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 앤트로픽이 북미에서 수백억 달러를 AI 모델에 쏟아붓는 동안, 일본 근로자 중 업무에 AI를 사용하는 비율은 8.4%에 불과했다. 미국도 21%로 높지 않지만, 영국 32%, 싱가포르 56%와 비교하면 일본의 수치는 더욱 낮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가 나온 직후, 일본 정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소프트웨어 AI에서는 이미 늦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완전히 다른 전장을 택했다.

■ 제조 로봇 DNA에 AI를 이식하라

일본이 내민 카드는 '피지컬 AI'였다. AI가 아무리 똑똑해도 현실 세계에서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하면 제조 현장에선 무용지물이라는 판단이었다. 자민당 디지털사회추진본부 AI·웹3 소위원회 사무국장 시오자키 아키히사 의원은 "일본이 없으면 세계의 AI가 움직이지 않는 불가결성을 확보하는 것이 진짜 AI 주권"이라고 선을 그었다. 생성AI 모델 개발 경쟁에서 밀렸다는 걸 인정하되, 반도체 제조 장비와 광전융합 기술, 그리고 산업용 로봇 공급망이라는 기존 강점에 AI를 접목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26년부터 5년간 1조 엔 규모를 소프트뱅크 주도의 신규 AI 회사에 쏟아붓기로 했다. 소니, 도요타, 덴소, NTT, NEC, 미쓰비시UFJ 등 8개 대기업 컨소시엄이 참여하는 이 회사는 피지컬 AI 기반 모델을 개발해 청소·경비 로봇부터 자율주행차까지 폭넓게 적용할 예정이다. 소프트뱅크는 데이터센터 구축에만 6년간 2조 엔을 투자한다. 구축된 기반 모델은 개방돼 각 기업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더 큰 그림도 나왔다. 일본 정부는 2040년까지 AI·반도체 등 17개 전략 분야에 정부와 민간을 합쳐 370조 엔 이상을 투자하는 성장 전략을 확정했다. 이 중 반도체 분야에만 68조 엔이 배정됐고, 피지컬 AI에는 10조 5000억 엔, 차세대 무선통신에 20조 5000억 엔이 책정됐다. AI·반도체 관련 중복 투자를 포함하면 총 102조 엔 규모다. 2030년까지 AI와 반도체에만 10조 엔(약 650억 달러)을 집행한다는 초기 계획은 더 확장됐다.

■ 2년 만에 2nm 양산 준비…라피더스의 불가능한 질주

일본 홋카이도 치토세시. 2022년 설립된 라피더스는 지난 7월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2nm 게이트올어라운드(GAA) 트랜지스터 시제품 동작 확인을 발표했다. IIM-1 팹 착공 후 채 2년도 안 돼서다. 2024년 12월 도입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는 3개월 만인 2025년 4월에 가동됐다. 코이케 준요시 대표이사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라는 말을 반복했다. 도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등 대기업 연합과 정부가 1조 7225억 엔을 지원한 결과였다.

라피더스가 2027회계연도 후반부터 홋카이도 지토세시에서 2나노미터급 첨단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진=CommonWealthMagazinr 캡처)

라피더스는 2027년 양산을 목표로 수율 개선에 나섰다. 2026년 1분기까지 2nm 공정 PDK를 고객사에 배포해 시제품 개발 환경을 제공할 계획이다. 양산까지 5조 엔이 필요하지만 아직 자금 확보는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TSMC와 삼성전자가 2025~2026년 2nm 양산을 계획 중인 상황에서 글로벌 경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현지 언론은 수율과 품질 안정화, 추가 투자 유치를 넘어야 할 과제로 꼽았다. 하지만 양산 기술 축적 없이 최첨단 노드에 도전한 회사가 이 정도 속도를 낸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 NTT의 광전융합, SK텔레콤과 손잡다

일본 최대 통신사 NTT는 빛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광전융합 기술 'IOWN'을 내세웠다. 전기 신호를 광신호로 치환해 저전력·고속 통신이 가능한 이 기술은 AI 데이터센터 운영의 핵심 기술로 평가받는다. NTT는 5년간 590억 달러를 글로벌 투자에 쏟아붓기로 했고, SK텔레콤, 대만 중화텔레콤과 함께 5억 달러(약 7600억 원) 규모의 IOWN 펀드를 조성했다.

자민당 시오자키 의원은 "일본이 없으면 세계 AI가 멈출 불가결성은 반도체 제조 장비와 광전융합 기술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생성AI 모델은 미국·중국에 뒤처졌지만, AI를 돌리는 하드웨어와 인프라는 일본이 쥐고 간다는 복안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앤트로픽의 최상위 모델 '미토스5'와 '페이블5'에 대한 외국인 접근을 전면 차단하자, 일본 정부는 오픈AI, 구글 등 다른 AI 개발사들과 접촉면을 넓히며 대안을 모색 중이다. 특정 AI 모델을 사용할 수 없어도 동등한 AI로 대체 가능한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도 AI 주권의 일부라는 게 일본의 시각이다.

■ 사카나AI, 일본산 소버린 AI 깃발 꽂다

일본에도 AI 스타트업 생태계가 조용히 싹트고 있다. 2023년 7월 설립된 사카나AI는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최적화된 효율적 AI 모델 개발에 집중하며 2024년 9월 시리즈 A 라운드에서 2억 1400만 달러를 유치해 기업가치 15억 달러로 유니콘에 등극했다. 2025년 11월 시리즈 B 라운드에서는 1억 3500만 달러를 추가 유치하며 기업 가치가 26억 5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2026년 3월 출시한 대화형 AI '나마즈'는 NTT의 '츠즈미', 후지츠의 '타카네', 라쿠텐, 야후재팬 등 일본 빅테크의 모델을 엔진으로 활용한다. 미쓰비시전기도 2026년 3월 사카나AI에 투자했다.

사카나 AI 로고. (사진=사카나AI 홈페이지)

하지만 기업 생태계 전체로 보면 일본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한국 AI 스타트업들이 대거 일본으로 진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은 첫 해외 지사를 도쿄에 냈고, 문서 정보 추출 AI 모델을 만드는 업스테이지도 지난해 일본 법인을 설립했다. 기업용 AI 소프트웨어 개발사 올거나이즈는 아예 본사를 일본으로 옮겼다. 현재 고객사의 60%가 일본 기업이다.

일본 정보경제사회추진협회(JIPDEC) 조사에선 생성AI를 활용 중이거나 도입을 추진하는 일본 기업이 70%에 달했다. 정부는 2030년까지 AI와 반도체 산업에 최소 10조 엔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수요는 폭발하는데 공급할 기술 스타트업이 부족한 '시장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다. 슈퍼브에이아이 관계자는 "일본제철이 산업 현장에 적용할 AI 기술을 찾았지만 일본 기업이 없어 한국까지 연락했다"고 전했다. 시장조사 업체 스태티스타는 일본 AI 시장이 2025년 101억 5000만 달러에서 2031년 411억 9000만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2031년 한국 시장 예상치의 2.5배 규모다.

■ 한국 의료 AI, "일본이 반했다"

일본 쇼와의대병원 방사선과 무라카미 고조 교수는 "대학병원에서 진료받으려면 최소 2주를 기다려야 한다"며 "한국의 AI 기술이 도입되면 이런 상황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드러냈다. 2025년 9월 도쿄 미나토구 시믹홀딩스 본사에서 열린 한·일 스타트업 인큐베이션 이벤트에는 폐암 AI 진단 개발사 모니터코퍼레이션, 초음파 영상 AI 진단업체 빔웍스, 내시경 영상 AI 진단 개발사 비바이노베이션, 디지털치료제 개발사 올라운드닥터스, MRI 촬영 시간 단축 기술을 가진 에어스메디컬 등 한국 의료 AI 기업 5곳이 초청받았다.

후지필름, 시스멕스 등 일본 의료기기 회사와 다이이찌산쿄 같은 글로벌 제약사, 교토대·게이오대·오사카대 병원 관계자까지 50여 개 기업과 병원이 참석했다. 일본 의료기기 유통사 도요코퍼레이션 관계자는 "한국 업체들이 만든 AI 의료기기는 지금 당장 병원에서 사용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일본은 의료기기 산업 전통 강자지만 벤처 생태계가 활성화되지 않아 혁신적인 AI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2024년에만 100여 개 AI 의료기기를 시장에 선보였다.

일본 정부가 2030년까지 의료계 디지털전환(DX)을 정부 주도로 추진 중인 것도 한국 기업에 호재다. UTC인베스트먼트 현지철 차장은 "기술 진입장벽을 낮추는 등 여러 정책이 도입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시믹홀딩스 미타케 아키히사 부사장은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자리잡으려면 품질을 입증할 임상 데이터가 필요할 것"이라며 "시믹이 임상 데이터 확보의 가교 역할을 맡겠다"고 밝혔다. 한국 의료 AI 기업 입장에선 일본 시장에서 검증받고 협업이나 투자를 통해 몸집을 키운 뒤 미국·유럽으로 가는 우회 루트가 열린 셈이다.

■ 보수주의 문화, AI 도입의 발목을 잡다

그러나 일본의 AI 전환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도쿄 기반 스타트업 쿠스AI 공동 창업자 오스틴 쉬는 "일본 기업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대다수의 동의와 승인을 구하는 문화, 각종 업무 절차 때문에 업무가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다"며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업무에선 AI의 실수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어떤 기업은 AI에 맡기느니 차라리 그 자리를 비워두는 편을 택한다고 덧붙였다.

교토 첨단과학대학 파리사 하기리안 국제경영학 교수는 "일본인들은 스마트폰 같은 기기를 다루는 건 좋아하지만 디지털 문해력은 낮은 편"이라며 "현실적으로 완전 고용 유지가 최우선 과제이기에 인력을 디지털 역량에 맞게 적응시키기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보수적이고 위험 회피적인 기업 문화, 낮은 디지털 문해력, 노후화된 IT 시스템, 일자리 감소에 대한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2025년 5월 28일 의회를 통과시키고 6월 4일 공포한 'AI 촉진법'을 통해 규제 완화로 기업 투자를 장려하고 있다. 재무성은 기업 AI 도입률이 5년 전 11%에서 75%로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근로자의 AI 활용은 글쓰기, 요약, 정보 수집 같은 위험도 낮은 업무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 정부는 "AI를 개발하고 활용하기 가장 좋은 국가"라는 목표를 세웠지만, 정책과 현장 사이의 간극은 여전하다.

■ 늦었지만 다른 길을 택한 일본

일본은 생성AI 모델 개발 경쟁에선 뒤처졌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반도체 제조 장비, 광전융합 기술, 산업용 로봇이라는 기존 강점에 AI를 접목해 '피지컬 AI'라는 새 전장을 열었다. 10조 5000억 엔을 쏟아붓는 피지컬 AI 프로젝트, 2년 만에 2nm 시제품을 만든 라피더스, 26억 5000만 달러 가치를 인정받은 사카나AI, 한국 스타트업까지 끌어들이는 거대한 시장. 일본의 AI 전략은 뒤늦었지만 명확하다.

다만 보수적인 기업 문화와 낮은 디지털 문해력, 완전 고용 유지 압박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 370조 엔 투자 계획이 실제 현장의 AI 활용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일본은 AI 게임에서 이미 패배를 선언하지 않았다. 그들은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려 하고 있다.

김광우 기자

kimnoba@tech4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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