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과 창작 영역까지 빠르게 확장하면서 소비자를 움직이는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등장할 때마다 더 나은 삶을 기대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AI가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확실한 선택과 안정적인 일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이 소비자를 설득하는 방식 역시 새로움과 성취를 강조하는 전략에서 신뢰와 안심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변화는 소비자가 돈을 쓰는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부담 없는 가격으로 유행을 즐기거나, 다른 사람이 추천한 검증된 제품을 선택하고, 자신의 건강과 취미에는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소비가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낯선 경험과 새로운 상품을 발견하는 일이 소비의 즐거움이었다면, 지금은 실패하지 않을 선택을 하거나 현재의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AI 시대의 변화는 건강과 노후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웰니스(Wellness)는 특별한 휴식이나 치유 경험을 넘어 하루의 컨디션을 관리하는 생활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본격적인 은퇴기에 진입하는 X세대 역시 기존 노년층과 다른 일자리, 여가, 소비 수요를 형성할 새로운 세대로 주목받고 있다.

박현영 생활변화관측소 소장은 13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디지털 마케팅 인사이트 2027(Digital Marketing Insight 2027, 이하 DMI 2027)' 기조강연에서 이 같은 변화에 주목했다.
올해 8회째를 맞은 DMI 2027은 'AI,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다시 쓰다'를 주제로 AI 기술이 기업의 업무 방식과 마케팅 전략, 고객 경험에 미치는 변화를 조명하는 행사다. 이날 첫 강연자로 나선 박 소장은 '2027 라이프스타일 트렌드: AI시대, 나를 지키는 조건'을 주제로 발표하며 기술 자체보다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난 9월 출간된 ‘2027 트렌드 노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소비자의 달라진 심리와 선택 기준을 분석하고, 기업이 앞으로 어떤 가치를 제공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했다.
AI 시대 소비자, 새로운 경험보다 '확실한 선택' 찾는다

박현영 소장은 현재 한국 사회의 주요 변화 요인으로 1인 가구 증가, 초고령화, 인공지능(AI) 확산을 제시했다. 이들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소비자들이 자신의 역할과 미래, 삶의 안정성에 대해 이전과 다른 고민을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박 소장이 주목한 것은 AI 확산에 따른 불안의 성격이다. 과거 웹과 스마트폰의 등장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활용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겼다면, AI는 인간의 업무와 창작 영역까지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 내 삶을 시작할 때 등을 전제로 한 시대가 아닙니다. 소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이 시대에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러한 현상은 웹의 시대 초입에도 그랬고 스마트폰이 처음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AI 시대의 우왕좌왕이 조금 다른 점은 ‘두려움’이라는 단어로 통칭되고 있다는 점이죠.”

이러한 정서적 변화는 소비자를 움직이는 동인에서도 나타난다. 박 소장은 과거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SNS)가 대중화되던 시기에는 유명 관광지나 호텔의 사진 한 장이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했다면, 최근에는 심리적 안정이나 좋은 기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행동의 동기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올해 초 화제가 된 관악산 방문 열풍이 대표적인 사례다. 좋은 기운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방문으로 이어진 현상에서 소비자들이 불안을 해소하고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박 소장은 이런 흐름이 실제 소비 영역에서 '위트 소비' '정답 소비' '투자 소비'라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소개했다.
첫 번째 위트 소비는 부담 없는 가격으로 유행에 동참하는 방식이다. 두바이 쫀득 쿠키(두쫀쿠)나 버터떡 등 화제가 된 먹거리가 대표적이다. 제품 자체의 가치뿐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구매하고 나눠 먹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관계와 이야기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두 번째 정답 소비는 실패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이미 검증됐다고 여겨지는 제품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코스트코에서 구매할 상품을 미리 정한 소비자조차 매장을 방문하기 전에 추천 제품 영상을 확인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소비자가 접하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선택지가 다양해지는 대신 특정 인기 제품으로 수요가 집중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세 번째 투자 소비는 자신의 건강과 취미처럼 지속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분야에 적극적으로 비용을 지출하는 방식이다. 과거에는 외부에 드러나는 의류나 명품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매일 먹는 달걀과 기름 등 일상적인 식재료의 품질을 높이는 데 투자하는 소비가 나타나고 있다. 박 소장은 이를 ‘정보가 공유될수록 쏠림 현상은 심해진다’는 말로 설명했다.
“AI 시대에는 다 같이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소비를 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쏠림 현상이 강화되면서 추천템이 더 주목받고 있습니다. 정보가 공유되니까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것이죠. 내가 이 집이 맛집이라는 정보를 알고 왔는데 어떻게 다른 곳에 가겠어요. 그러니까 확신을 주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소비자가 직접 경험을 알리는 영상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마케터나 직원이라도 그런 영상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변화는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도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소비자의 선택을 이끌기 위해서는 제품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매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있는 정보와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건강과 취미 등 장기적인 관심 분야에서는 지속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 경쟁력으로 연결될 수 있다.
웰니스는 '오늘 하루의 컨디션 관리'… 유지와 회복의 가치 커진다

박 소장이 두 번째로 주목한 변화는 웰니스(Wellness)의 일상화다. 과거 웰니스는 호텔 스파나 온천, 치유 관광처럼 특별한 공간에서 경험하는 서비스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상에서 몸의 상태를 관리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가벼운 산책과 사우나, 수면 관리 등이 대표적이다. 소비자들이 건강을 바라보는 관점도 획기적인 개선이나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현재의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 박 소장의 분석이다.
“지금 시대 소비자의 웰니스는 뭐냐면 오늘 하루 컨디션 관리입니다. 오늘 하루를 망치지 않고 컨디션 관리를 잘해서 잘 자고 잘 먹고 잘 일어나서 내일 또 에너지를 써야지, 이렇게 오늘 하루를 관리하는 것을 사람들이 웰니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내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목표 자체가 오늘 하루 컨디션 관리가 됐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회복이나 리셋 같은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박 소장은 특히 수면에 대한 관심과 관련 제품의 확산을 이러한 변화의 사례로 제시했다. 소비자들이 특별한 질병이 없더라도 더 잘 자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으며, 수면을 비롯한 일상적인 건강관리를 지원하는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 관련 제품을 설명하는 언어 역시 달라지고 있다. 외모나 건강을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메시지보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노화를 관리하며 저하된 컨디션을 회복한다는 개념이 소비자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분석이다.

“예전에는 영양제를 먹으면 더 예뻐지고 더 건강해지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처럼 이야기했죠. 그런데 지금은 ‘유지시켜 줄게’라는 것입니다. 노화가 될 건데 그걸 천천히 가게끔 관리하자는 것이죠. 원래 이 정도였는데 떨어졌다면 그걸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이고요. 어떻게 보면 목표 자체가 높지 않은 유지, 이런 것들이 소비자에게 먹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소비자들이 건강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는 경향도 주목할 변화다. 박 소장은 코르티솔과 미주신경, 자율신경계처럼 과거에는 전문적인 의학 용어로 여겨졌던 개념들이 일상적인 건강관리의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비만 치료제의 확산 역시 소비자들이 호르몬의 작용과 신체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기업이 유명인의 추천이나 광고에 의존하기보다 제품과 서비스의 작동 원리, 활용 목적 등을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웰니스 시장은 일회성 치유 경험이나 극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방식에서 일상의 건강 상태를 관리하고 유지·회복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박 소장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관리 비즈니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은퇴하는 X세대가 새로운 시장으로… “신선도보다 신뢰도가 중요”

박 소장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변화는 새로운 소비자 집단으로 부상하는 은퇴 세대다. 박 소장은 X세대가 본격적으로 은퇴기에 진입하면서 기존 노년층과 다른 생활방식과 소비 수요를 형성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이들이 대중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해 온 세대인 동시에 일과 성취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X세대는 대중문화 1세대로서 문화 소비를 향유하는 사람들이죠. 내가 좋아하는 음악, 영화, 음식, 여행 같은 대중문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처럼 오직 나만을 위해 소비하고 나만 좋자고 놀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베이비붐 세대처럼 은퇴한 라이프를 지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X세대의 은퇴 라이프가 새롭게 발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은퇴가 곧 노후를 의미했다면, 앞으로는 은퇴 이후에도 새로운 일과 사회적 활동을 이어가는 시기가 길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박 소장은 2016년에는 은퇴와 노후를 사실상 같은 의미로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은퇴와 관련된 단어로 자격증, 일자리, 직업 등이 등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강연에서는 경제적 여유가 충분하더라도 소득 활동을 지속하겠다는 응답이 약 70%에 달했다는 조사 결과도 제시했다. 박 소장은 이러한 응답의 배경으로 생활의 리듬을 유지하고 사회적 역할을 이어가려는 욕구를 꼽았다.

기업의 고객 분류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박 소장은 50대와 60대를 하나로 묶는 '5060 시니어'라는 표현이 실제 소비자의 다양한 삶의 단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봤다. 단순한 나이보다 경제활동과 독립, 은퇴 이후의 새로운 삶처럼 개인이 수행해야 하는 과업을 기준으로 고객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자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이 제공해야 할 가치도 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박 소장은 2010년부터 2025년까지 이어진 스마트폰과 앱 중심의 시대를 새로운 경험과 상품을 통해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발전시키는 시기로 설명했다.
반면 AI 시대에는 현재의 삶을 유지하고 불안을 덜어내는 일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를 바탕으로 소비자가 느끼는 불안과 부담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위로 비즈니스'를 기업의 새로운 과제로 제시했다.
“지금 AI 시대에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시대라기보다는 유지하고 관리하고 회복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떨어지기가 쉽다는 것이죠. 그걸 북돋아 주는 위로 비즈니스가 기업의 과제가 될 수 있고, 안심을 주는 것이 오히려 더 기업에 유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앱 시대의 기업에 신선도가 중요했다면 지금 AI 시대에는 신뢰도가 중요한 것이죠.”

한편 이날 DMI 2027에서는 소비자 변화에 대한 분석을 시작으로 브랜드 전략과 데이터 활용, AI 기반 마케팅 혁신에 관한 논의가 이어진다.
오전 공통 강연에서는 어도비 차정원 시니어 매니저가 'AI 시대에도 브랜드를 잃지 않는 법'을 주제로 생성형 AI 확산 속에서 기업의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안을 다룬다. 데이터라이즈 박민성 최고전략책임자(CSO)는 '대시보드를 여는 시대는 끝났다: 고객사 슬랙에 출근하는 AI'를 주제로 데이터 분석과 고객 대응 업무의 변화를 소개한다.
오후에는 2개 트랙을 통해 AI 기술의 구체적인 마케팅 적용 사례를 공유한다. 첫 번째 트랙에서는 함샤우트글로벌 공인희 본부장이 산업별 AI 인용 채널의 차이와 검색 최적화 사례를 소개하고, 현대자동차 양효원 매니저가 'GEO를 다시 생각하다: 인하우스 관점에서 본 Search Everywhere Optimization'을 주제로 발표한다.
이어 노션 채지선 총괄은 AI 에이전트가 마케팅 조직의 업무 방식을 어떻게 바꾸는지 살펴보며, 시스원 손병홍 이사는 AI를 활용한 디지털 서비스 운영 혁신을 다룬다.
두 번째 트랙은 데이터 활용과 초개인화, 콘텐츠 전략에 초점을 맞춘다. 애드타입 양승만 이사는 현실 세계에서 수집되는 데이터가 광고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 팀리미티드 배수혁 대표는 AI 시대 초개인화 마케팅에 필요한 데이터 활용 방안을 소개한다.
또한 그립컴퍼니 오명석 리드는 팬덤이 미디어로 발전하는 과정을, 트웰브랩스 송동운 리드는 AI 기반 영상 분석 기술이 마케터의 업무와 경쟁력에 미치는 변화를 다룰 예정이다.
이와 함께 'AI가 마케팅팀에 들어오면 생기는 일'을 주제로 그립컴퍼니, 토스증권, 삼성전자 실무진이 참여하는 패널토론도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이벤터스 안영학 대표가 오프라인 경험과 데이터에 기반한 잠재고객 확보 전략을 소개한다.
이번 DMI 2027은 AI를 활용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나아가 기업이 실제로 어떤 업무를 바꾸고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소비자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 브랜드 전략과 데이터 활용, AI 기반 실행 체계로 이어지는 프로그램 구성은 기업들이 마주한 AI 전환의 과제를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