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켤수록 더 더워진다…'냉방의 역설'에 갇힌 지구

폭염을 피해 켜는 에어컨이 오히려 더 강한 폭염을 부르는 악순환 구조가 도마 위에 올랐다.

기온이 오르면 에어컨 사용이 늘어난다. 늘어난 사용량은 전력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기후변화를 심화시킨다. 심화된 기후변화는 더 강한 폭염을 부르고, 폭염은 다시 에어컨 수요를 늘린다. 전문가들은 이 구조를 '에어컨의 역설' 또는 '냉방 딜레마'라고 부른다.

국내 상황은 이런 흐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 6월 '2026년 여름철 전력수급 전망 및 대책'을 통해 올여름 최대 전력수요가 94.1~98.8GW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종전 최고치인 2024년 8월 97.1GW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실제로 지난달 13일에는 전력 수요가 올여름 처음으로 90GW를 돌파했고, 예비율은 10%까지 떨어졌다.

폭염 일수도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2025년 폭염 일수는 29.7일로 평년을 크게 웃돌았다. 지난달 말에는 경남 양산에서 낮 최고기온이 사흘 연속 국내 기상 관측 이래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며 지난 2일 42.5도까지 치솟았다. 양산은 7월 29일부터 닷새 연속 40도를 웃돌았는데, 197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해외 상황도 다르지 않다. 지난 6월 하순 서유럽 전역에 40도를 넘는 폭염이 덮치면서 독일에서만 5,000명 이상 등 유럽 전체에서 1만 명 이상이 열 관련 사망으로 추정됐다. 7월에는 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 등에서 폭염과 산불이 재차 이어졌고, 유럽 각국의 전력 수요도 함께 급증한 것으로 전해졌다.

(출처=AI 생성 이미지)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 에너지전망 2024' 보고서에서 2050년까지 전 세계 전기 수요가 두 배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데이터센터 급증, 폭염 빈발에 따른 에어컨 사용 증가, 청정에너지 생산을 위한 전력 사용량 증가를 이유로 전기 수요 예측치를 전년보다 6% 상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에어컨으로 인한 전력 수요 증가폭이 데이터센터 부문을 웃돌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탈리아 CMCC 재단 연구팀이 2024년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2050년까지 전 세계 주거용 에어컨 보급률은 27%에서 41%까지 늘어난다. 이에 따라 주거용 냉방 전력 수요는 1220TWh(테라와트시)에서 최대 1940TWh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IEA는 전 세계 냉방 기기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이 전체 배출량의 약 7%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자동차 등 수송 부문 배출 비중(14%)의 절반 수준이다. 국내에서는 여름철 피크 시간대 전력 소비 가운데 30~40%가 냉방기기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력 소비뿐 아니라 냉매 자체도 문제로 지목된다. 에어컨에 쓰이는 냉매인 수소불화탄소(HFCs)는 원래 오존층을 파괴하던 옛 냉매(CFCs·HCFCs)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물질이다. 오존층 문제는 해결했지만, 대신 이산화탄소보다 최대 1만 배 이상 강력하게 지구를 데우는 온실가스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환경부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의 2022년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통계를 보면, 이 HFCs 사용량이 늘면서 관련 부문 배출량이 전년 대비 약 280만톤(9.5%) 증가했다.

환경단체 기후솔루션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HFCs 배출량은 2018년 대비 40%가량 증가했고, 국가 총 배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5%에 이른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에서 쓰이는 HFCs 대부분은 냉동공조용 냉매로 사용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HFCs는 종류에 따라 이산화탄소보다 최대 1만 배 이상 강한 온실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번 배출되면 대기 중에 오래 남아 온실효과를 지속적으로 유발한다.

국내 HFCs와 산업부문 산정 범주당 온실가스 배출량 비교 (2007~2022년) (출처=기후솔루션 홈페이지)

시장에서는 에어컨 수요 자체도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관련 업계 보고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수요 증가와 도시화, 고효율 설비에 대한 각국 정부의 지원책이 맞물리며 주거용 에어컨 시장이 상당 기간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노후 냉매 장치를 지구온난화지수(GWP)가 낮은 대체 냉매로 교체하는 흐름과 폭염 지역의 에너지 효율 개선 수요도 성장 요인으로 꼽힌다.

결국 폭염에 대응하기 위한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모이면 기후위기를 가속하는 구조적 요인이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냉방 수요 자체를 억제하기보다 고효율 기기 보급과 저GWP 냉매 전환,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공급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정재엽 기자

anihil@tech42.co.kr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저작권자 © Tech42 - Tech Journalism by AI 테크42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안경 위 AI 전쟁 본격화…삼성 가세로 판 커지는 스마트글래스 시장

메타가 독주해온 스마트글래스 시장에 삼성전자가 '인텔리전트 아이웨어'로 참전했다. 시장 현황과 삼성·메타 비교, 소비자 반응과 남은 과제, 2027년으로 밀린 애플의 전략까지 정리했다.

"돈 그냥 쓰던 아이가 계획 소비"… 경험형 금융교육 효과 확인

교실 중심의 이론 교육을 넘어 일상 속에서 직접 돈을 관리해 보는 실천형 금융 경험이 청소년들의 소비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조사 결과가 공개됐다.

애플, 월구독형 기기 리스 서비스 '애플 업그레이드' 전격 공개

애플이 하드웨어 기기를 구독 형태로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리스 서비스인 '애플 업그레이드(Apple Upgrade)'를 이르면 오는 7월 28일 미국 시장에 출시할 예정이다.

"AI 유료화, 새로운 디지털 격차 낳는다"

한국소비자연맹 조사 결과 소비자 71.9%가 AI 유료화로 디지털 격차가 심화될 것을 우려했으며, 실제 유료 구독 확산세도 여러 조사에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