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6월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공개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의 청사진은 분명 압도적이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호남권에 800조원을 투입해 메모리 팹(Fab) 4기를 구축하고, 충청권에는 81조원 규모의 첨단 패키징 거점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룹 전체의 향후 10년 투자 규모를 합치면 2000조원에 육박한다는 분석까지 더해지면서, 한국 산업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형 발표가 됐다.
그러나 발표가 끝나기 무섭게 산업계와 정치권은 환호보다 질문을 먼저 쏟아내고 있다. 지역 균형발전과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정부의 그림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 그림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풀어야 할 매듭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8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의문들, 지금 그것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 입지 선정 과정에 드리운 그림자
가장 먼저 거론되는 쟁점은 입지 선정의 절차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통상 부지 검토에만 5~7년이 소요된다. 토지 가격, 전력망 연계성, 용수 공급,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 접근성 등 수십 가지 변수를 정밀하게 따져야 하는 까닭이다. 이번 호남 클러스터 결정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는 점이 시장의 첫 번째 의문이 된 이유다.

이런 절차적 문제는 곧바로 정치적 외압 논란으로 번졌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정부가 입지를 점지하는 방식이 아닌 미국 반도체법(CHIPS Act)처럼 객관적 기준과 공모 심사 절차를 법으로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미, 청주 등 다른 지역이 수년간 유치 경쟁을 벌여온 것과 달리, 이번 결정은 절차적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과거 기록까지 소환되며 의문은 더 깊어졌다. 2023년 광주·전남이 추진했던 반도체 산업단지는 전공정이 아닌 후공정 특화 단지였다. 후공정은 전공정에 비해 전력·용수 사용량이 훨씬 적고 인프라 부담이 작다. 그런데 3년 만에 같은 지역에 전공정 팹 4기를 짓겠다는 계획이 등장하자, "그때는 왜 후공정만 검토했고 지금은 왜 전공정이 가능하다고 보는가"라는 합리적 의심이 나오는 것이다.
■ 용인의 8년이 호남에 던지는 경고
절차적 논란보다 더 묵직한 무게로 다가오는 건 인프라 문제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사례가 그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약 900조원을 투입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이 프로젝트조차 전력 공급과 용수 확보 문제로 8년 가까이 첫 삽을 뜨지 못했다. 고전압 송전탑 설치를 둘러싼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반대가 5년 이상 공사를 지연시켰고, 상수원 인근 주민들과의 용수 갈등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용인이 그러했다면 호남은 어떨까. 정부는 "용수가 풍부하고 신재생에너지가 많다"는 점을 호남의 강점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업계의 진단은 사뭇 다르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때문에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안정적 전력 공급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동해안 일대 원전에서 전력을 끌어오기 위한 대규모 송전망 건설이 필수인데, 이 또한 새로운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용수 문제는 더욱 까다롭다. 이주완 인더스트리 애널리스트는 와이티엔(YTN) 라디오 인터뷰에서 "과거 용수가 풍부하다고 판단했던 용역 결과는 주로 후공정만을 염두에 둔 계산이었다"며 "전공정 팹은 후공정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대한 전력과 용수를 소비한다"고 지적했다. 전공정 팹 한 곳이 하루에 쓰는 물은 수만 톤. 농업용수 부족을 우려하는 주민들과의 마찰은 피하기 어려운 시나리오다.
■ R&D와 생산라인을 가르는 '시간의 벽'
설령 인프라 문제를 풀어낸다 해도 또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거리다. 반도체 산업에서 연구개발(R&D) 조직과 생산 라인의 물리적 거리는 그 자체로 경쟁력의 핵심 변수다. 삼성전자의 핵심 R&D 인력은 수원과 화성에, SK하이닉스의 R&D는 이천에 집중돼 있다. 여기에서 광주·전남까지는 차로 3~4시간 거리다.
이 거리가 단순한 이동 시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는 수율 저하, 장비 이상, 공정 조정 같은 돌발 변수가 수시로 발생한다. 이때 R&D 인력과 소부장 협력업체 인력이 곧바로 투입돼야 한다. 이천·수원 공장 인근의 소부장 업체들이 상주 인력을 두고 '5분 대기조' 체제를 가동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문제는 영세한 국내 소부장 업체들이 광주나 전남에 별도 사무소를 내고 인력을 상주시킬 여력이 있느냐는 점이다. 이주완 애널리스트는 "알앤디(R&D) 핵심 인력과 생산라인이 분리되면, 결국 공장을 중국에 짓는 것과 같은 비효율이 발생한다"며 "반도체는 시간과 돈의 싸움인데 물리적 이동 시간이 길어지면 경쟁력 자체가 흔들린다"고 우려했다.
■ 인력 확보, 또 하나의 시험대
인프라와 거리 문제를 모두 해결한다 해도 마지막 관문이 남는다. 사람이다. 반도체 공장은 석박사급 연구 인력보다 대졸·전문대졸·고졸 출신의 숙련 생산직 비중이 훨씬 높다. 호남의 500만 인구로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단순히 인구수가 아니라 숙련도와 정주 여건이 관건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용인 클러스터조차 인력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호남에 단기간 내 수만 명의 숙련공을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수도권 인재들을 호남으로 유인하려면 교육·의료·문화 등 생활 인프라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공장만 짓는다고 사람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 정부 지원책의 실효성
이런 다층적 우려를 정부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내놓은 카드가 파격적인 지원책이다. 산업통상부는 반도체 특별법 시행령을 개정해 비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에 전력·용수 등 기반 시설 설치비를 최대 100% 국비로 지원하기로 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차세대 반도체 선도전과 관련해 "15년간 30조원을 투자해 R&D, 설계, 실증, 제조까지 전 주기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법적 지원과 실제 집행 사이에는 늘 간극이 존재한다. 송전망 건설과 용수 공급 시설 확충은 환경영향평가, 주민 동의, 토지 보상 등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부는 일본 구마모토현이 대만 반도체 회사 티에스엠시(TSMC) 공장 유치를 위해 5년 공기를 20개월로 단축한 사례를 벤치마킹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한국의 행정 시스템과 사회적 합의 구조가 일본과 같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낙관만 하기는 어렵다.
■ '용인 포화론'을 둘러싼 시각차
정부가 호남 클러스터의 명분으로 가장 강조하는 논리는 '용인 포화론'이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현재 가동 및 건설 중인 용인 클러스터는 2034~2035년 무렵 완전히 포화 상태에 이를 것"이라며 신규 거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국민보고회에서 "기존의 용인·평택 중심 사이트는 이미 전력·용수 등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수요 증가 속도를 고려할 때 추가 생산 거점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논리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산업계의 시선은 미묘하게 다르다. 용인 클러스터는 삼성전자가 2034년, SK하이닉스가 2039년 완공을 목표로 한 장기 프로젝트다. 아직 절반도 채워지지 않은 시점에 포화를 단정 짓는 건 성급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반도체 시장이 주기적으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해온 역사적 패턴을 감안하면, 10년 뒤 수요를 지금 시점에서 확정적으로 예측하는 것도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 속도와 신뢰, 두 개의 축
결국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논란의 본질은 '실현 가능성에 대한 신뢰' 문제로 모인다. 800조원이라는 숫자는 한국 산업사에서 가장 큰 단위 투자 가운데 하나지만, 그 숫자에 걸맞은 사회적 합의와 절차적 정당성이 아직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 입지 선정의 투명성, 인프라 확보의 현실성, R&D 연계의 효율성, 인력 수급의 가능성 등 풀어야 할 매듭이 동시다발적으로 놓여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온 나라가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속도를 강조했다. 하지만 속도만큼 중요한 것이 방향이다. 국가 전략산업인 반도체를 정치 논리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기업의 자율적 판단을 보장하고, 입지 기준과 지원 절차를 법적으로 제도화하는 작업이 병행돼야 이 거대한 청사진이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성공으로 가는 길에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빈틈없는 행정력이 필수다. 송전망과 용수 시설 건설을 위한 주민 설득, 환경영향평가 신속 처리, 인허가 절차 간소화 등 모든 행정 자원이 동원돼야 한다. 동시에 다른 지역에 대한 형평성 있는 투자 전략도 함께 제시돼야 특정 지역 혜택론을 잠재울 수 있다.
지금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기대와 의구심이 교차하는 출발선에 서 있다. 2000조원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투자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발표 당일의 박수보다, 앞으로 10년간 묵묵히 쌓아 올릴 실행의 발자취가 훨씬 중요하다. 정부와 기업이 약속한 청사진을 어떻게 현실로 옮겨낼지, 그 답을 만들어가는 시간은 이미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