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머노이드 로봇의 움직임은 빠르게 정교해지고 있다. 물건을 집어 옮기고 선반에 정리하거나 사람의 동작을 따라 하는 모습도 더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정교하게 통제된 시연 공간을 벗어나 공장과 물류센터, 매장 같은 실제 현장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체 위치가 조금만 달라지거나 조명이 바뀌고, 작업자가 로봇의 이동 경로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동작이 중단될 수 있다.
이때 로봇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추가 데이터를 수집하고 모델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면 도입 시간과 비용은 늘어난다. 하드웨어 성능이 좋아지는 것만으로 휴머노이드의 상용화가 완성되지 않는 이유다. 결국 현장에서 마주치는 변수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처리하고, 새로운 작업을 얼마나 빠르게 가르칠 수 있느냐가 로봇의 실용성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릴리오(Lili-o)는 이 간극을 로봇 소프트웨어로 좁히려는 피지컬 인공지능(Physical AI) 스타트업이다. 휴머노이드와 다목적 로봇에 적용할 ‘결정론적 두뇌(Deterministic Brain)’를 개발하고 있다. 작업 계획과 실제 동작 제어를 분리한 구조에 한 번의 시연으로 업무를 가르치는 원샷 학습(One-shot Learning)을 결합해 현장 도입 부담을 낮추겠다는 구상이다.
릴리오는 니콜라스 마츠케(Nicolas Metzke) 최고경영자(CEO)와 루도빅 메트르(Ludovic Maitre)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중심으로 2025년 프랑스에서 설립됐다. 오지성 최고수익책임자(CRO)는 이후 공동창업자로 합류했다. 현재 프랑스 조직은 핵심 기술과 제품 개발을, 한국 조직은 고객 발굴과 사업 검증을 주로 담당한다. 이들은 글로벌 벤처캐피탈(VC) 앤틀러의 피지컬 AI 특화 프로그램 ‘앤틀러 포지(Antler Forge)’에도 참여하며 한국 시장에서 실증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이에 테크42는 오 CRO를 만나 릴리오가 바라보는 휴머노이드 상용화의 병목과 결정론적 두뇌의 작동 방식, 향후 사업 전략을 들었다.
화려한 데모와 실제 현장 사이…릴리오가 주목한 ‘소프트웨어 병목’

릴리오가 출발점으로 삼은 질문은 명확하다. ‘연구실이나 시연 환경에서 잘 움직이는 로봇이 왜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같은 수준의 성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가’다. 오 CRO는 “데이터에서 학습한 패턴을 토대로 다음 행동을 선택하는 방식만으로는 이처럼 끊임없이 달라지는 조건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이 릴리오의 문제의식”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현재 휴머노이드 하드웨어는 계속 발전하고 있고 제작 비용도 점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봇을 실제 현장에 투입하지 못하게 하는 병목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에 있다고 봅니다. 연구실에서는 잘 움직이던 로봇도 공장이나 매장에 들어가면 조명 변화와 물체 위치의 오차, 사람의 이동 같은 수많은 변수를 만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어야 비로소 상용화가 가능합니다.”
릴리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데이터에 기반한 확률적 추론에 모든 행동 결정을 맡기기보다 물리·기하학적 규칙과 명시적인 작업 계획을 결합한다. 주변의 모든 환경 정보를 동일한 비중으로 처리하는 대신, 로봇이 다뤄야 할 목표 물체의 형태와 위치 관계를 중심으로 이동 경로를 계산하는 접근이다. 오 CRO는 이를 ‘문제와 답을 외운 학생’과 ‘공식을 이해한 학생’의 차이에 비유했다.
“기존 방식을 수많은 문제와 답을 외운 학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학습한 문제와 비슷한 상황에서는 답을 찾을 수 있지만 처음 보는 변형 문제가 나오면 판단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릴리오가 지향하는 두뇌는 행동에 필요한 기초 원리를 이용해 문제를 다시 푸는 방식입니다. 현장에 변수가 생기면 그 상황에 맞는 계획과 이동 경로를 새로 계산합니다.”

기술 구조는 크게 계획 계층(Planning Layer)과 실행 계층(Execution Layer)으로 나뉜다. 계획 계층은 작업 목적을 해석하고 수행 순서를 정한다. 실행 계층은 계획을 실제 로봇의 관절 움직임과 이동 궤적으로 바꾼다. 릴리오는 계획 계층에서 계획 도메인 정의 언어(Planning Domain Definition Language, PDDL)를 활용하는 구조도 제시하고 있다.
작업을 여러 개의 ‘단위 행동(Atomic Actions)’으로 나누는 것도 특징이다. 물체를 인식하고 팔을 뻗어 집은 뒤 정해진 위치로 옮기는 과정을 하나의 긴 동작으로 처리하지 않고, 각각의 행동 단위로 분리하는 방식이다. 작업 도중 물체가 움직이거나 장애물이 생기면 전체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대신 문제가 발생한 지점에서 계획을 수정하고 필요한 행동을 다시 조합한다.
한 번 보여주면 작업 생성…원샷 학습의 가능성과 남은 과제

현장 자동화에서는 로봇의 작업 수행 능력만큼 새로운 업무를 가르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도 중요하다. 생산 품목과 작업 방식이 자주 바뀌는 공정이라면 작업이 달라질 때마다 대규모 데이터를 다시 수집하고 모델을 조정하는 방식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릴리오는 한 번의 시연을 토대로 새로운 동작을 생성하는 원샷 학습으로 이 문제를 풀려 한다. 작업자가 로봇의 팔을 잡고 필요한 동작을 직접 보여주거나 원격으로 로봇을 조종해 작업 과정을 시연하는 방식이다. 이를 토대로 로봇이 수행해야 할 동작과 이동 경로를 생성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작업자가 로봇을 직접 움직여 동작을 보여주거나 원격 제어로 한 번 시연할 수 있습니다. 수천 번의 반복 학습을 거치는 대신 시연에서 필요한 동작을 추출해 작업을 생성하는 방식입니다. 작업이 자주 바뀌는 다품종 소량 생산 환경에서 특히 유용할 수 있습니다. 로봇을 새로운 업무에 투입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 기간을 줄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우선 적용 대상으로는 물품 상자 정리, 부품 집어 옮기기(pick-and-place), 포장, 버튼과 단순 기계 조작처럼 규칙이 비교적 명확한 반복 작업을 제시한다. 반면 옷감처럼 형태가 계속 변하는 물체를 다루거나 정교한 촉각 피드백이 필요한 작업은 아직 기술적으로 풀어야 할 영역이다. ‘한 번의 시연’이 곧 모든 종류의 작업을 즉시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 셈이다.

특정 제조사의 로봇에만 종속되지 않는 하드웨어 비종속(hardware-agnostic) 설계도 릴리오가 내세우는 방향이다. 새로운 로봇에 소프트웨어를 적용할 때 두뇌 전체를 다시 개발하는 대신, 해당 로봇의 관절 구조와 가동 범위 등 하드웨어 정보를 실행 계층에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통합 로봇 설명 형식(Unified Robot Description Format, URDF)과 같은 로봇 설명 데이터를 활용한다.
“생각하고 작업 순서를 정하는 계획 계층과 실제 관절을 움직이는 실행 계층을 분리했습니다. 새로운 로봇에 적용할 때는 계획 구조를 다시 만드는 대신 해당 기체의 관절 사양과 가동 범위를 실행 계층에 매핑합니다. 핵심 알고리즘을 유지하면서 서로 다른 로봇을 제어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다만 하드웨어 비종속성이 별도의 통합 작업까지 없앤다는 뜻은 아니다. 제조사마다 센서와 관절 구성, 제어 시스템이 다른 만큼 실제 확장성은 새로운 로봇에 소프트웨어를 적용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에 좌우된다.
제조사와 도입 기업 잇는 B2B2B…한국을 글로벌 실증 거점으로
릴리오는 로봇 하드웨어를 직접 제조해 최종 고객에게 판매하기보다 제조사와 유통사, 실제 로봇을 도입하는 기업을 연결하는 B2B2B 구조를 지향한다. 첫 번째 고객은 로봇 하드웨어 제조사와 유통사다. 이들에게 결정론적 두뇌를 공급해 단순한 로봇 기체가 아니라 특정 현장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완성형 솔루션을 구성하도록 지원한다. 제조·물류·리테일 기업에는 로봇이 실제 공정과 작업 환경에 맞춰 움직이도록 시스템 통합(System Integration, SI)을 제공한다.
수익 모델도 단계적으로 구축할 계획이다. 초기에는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와 유료 개념 검증(Proof of Concept, PoC)을 통해 기술을 검증하고 매출 기반을 만든다. 장기적으로는 실제 현장에서 가동되는 로봇 수에 따라 비용을 받는 서비스형 로봇(Robotics-as-a-Service, RaaS) 구독 모델로 확장한다는 구상이다.
“릴리오는 로봇 제조사와 경쟁하기보다 파트너사의 하드웨어가 현장에서 실제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지향합니다. 초기에는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와 PoC를 통해 기술을 검증하고, 장기적으로는 현장에서 가동되는 로봇 수를 기반으로 반복 매출을 만들 계획입니다. 파트너사는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완성형 솔루션을 공급하고, 릴리오는 파트너사의 유통망을 활용해 시장을 넓히는 구조입니다.”
오 CRO는 독일 로봇 유통·시스템 통합 기업 테라 로보틱스(Terra Robotics)와 상업 현장 적용을 위한 통합 검증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과 유럽의 로봇 제조·유통 기업들과도 개념 검증(PoC)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또 오 CRO는 고객이 실제 도입 여부를 판단할 때 중요하게 보는 지표로 총소유비용(Total Cost of Ownership, TCO)과 현장 가동률을 꼽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릴리오의 아시아 시장 진출과 기술 검증을 위한 거점이다. 국제로봇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Robotics, IFR)이 올해 4월 공개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제조업 로봇 밀도는 2024년 기준 근로자 1만 명당 1220대로 세계 1위다.

릴리오는 로봇 활용도가 높은 한국에서 다양한 하드웨어와 산업 환경을 접하며 기술 성능과 경제성을 검증한 뒤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Asia-Pacific, APAC) 시장으로 사업을 확대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2027년 상반기까지 현재 5명인 팀을 10명 이상으로 늘리는 한편, 연구개발(Research and Development, R&D) 인력을 확충하고 현장 적용과 고객 맞춤형 시스템 통합 엔지니어링 역량을 보강할 계획이다.
“한국은 다양한 로봇 하드웨어와 제조·물류 수요가 밀집한 시장입니다. 기술 성능뿐 아니라 고객이 실제 비용을 지불할 만한 경제성을 검증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여기서 확보한 실증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하려 합니다.”
오 CRO는 릴리오의 성공을 판단할 기준으로 매출이나 기업 가치보다 ‘사람이 로봇을 다시 학습시키거나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실제 현장에서 일상 업무를 완수하는 로봇의 수’를 꼽았다. 화려한 시연을 넘어 매일 반복되는 업무를 안정적으로 수행하는 로봇을 얼마나 늘릴 수 있느냐가 기술의 실질적인 가치를 보여준다는 의미다.
“과거 개인용 컴퓨터 산업에서 하드웨어 기종과 관계없이 운영체제가 중요한 공통 기반으로 자리 잡았듯, 릴리오도 다양한 로봇에 적용되는 두뇌 소프트웨어를 만들고자 합니다. 3년 뒤에는 휴머노이드 제조사들이 먼저 찾는 ‘표준 로봇 두뇌 소프트웨어’ 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결국 데모용 로봇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로 일하는 로봇이 얼마나 늘어나는지가 릴리오의 성과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