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우려는 이제 낯설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직업이, 얼마나, 왜 사라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블룸베리의 헨리 윙 치우 최고기술책임자(CTO)가 최근 공개한 대규모 분석 결과는 이런 의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 채용 데이터 전문기업 리빌레라(Revealera)의 자료를 활용해 약 3년간(2023년 1월~2025년 10월) 전 세계에서 올라온 1억8천만 건의 구인공고를 추적한 이번 연구는, AI가 노동시장을 어떻게 재편하고 있는지를 숫자로 보여준다.
2025년 들어 전체 구인공고는 전년 대비 8% 줄었다. 미국 구직 플랫폼 인디드(Indeed)가 발표한 미국 내 감소율 7.3%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 8%가 시장 전체의 기준선이다. 특정 직종이 이보다 훨씬 많이 줄었다면, 그 배후에는 구조적 변화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컴퓨터그래픽 아티스트(3D, VFX 등)의 채용공고는 2025년 한 해 동안 33% 급감했다. 2024년에도 12% 감소했던 것을 고려하면 2년 연속 큰 폭 하락이다. 사진작가와 작가(카피라이터, 편집자 등 포함)도 각각 28% 줄어들었다.
기자·리포터 채용은 22%, 홍보 전문가는 21% 감소했다. 이미지 생성 AI, 텍스트 생성 AI가 이들의 '실행 업무'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는 신호다.
하지만 모든 창작 직군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나 크리에이티브 매니저처럼 전략을 짜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은 시장 평균보다 나은 성적을 냈다. 그래픽 디자이너, 제품 디자이너처럼 고객 요구를 분석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직무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치우 CTO는 "감소하는 것은 '창의적 직업' 자체가 아니라 창의적 실무 작업"이라며 "전략적 창의 리더십은 오히려 괜찮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채용 감소가 모두 AI 때문만은 아니다. 기업 준법감시 전문가 채용은 29% 줄었고, 지속가능성 전문가와 환경 기술자는 각각 28%, 26% 감소했다.
특히 지속가능성 분야는 직급과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실무자급 25%, 프로젝트 매니저 32%, 일반 매니저 35%, 디렉터급 31%가 각각 감소했다. 이는 미국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정책이 정치적 논란에 휘말린 영향으로 풀이된다. 반면 무역 준법 전문가는 18% 늘었다.
의료 분야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의사-환자 면담 내용을 기록하는 의료기록 작성원(Medical Scribe) 채용은 20% 감소했다. 환자와 의사의 대화를 듣고 자동으로 진료 기록을 생성하는 AI 도구 덕분이다. 반면 의료 코더(진료 내역 코드화)는 거의 변화가 없었고, 의료 보조원은 6% 감소에 그쳤다.
머신러닝 엔지니어(AI 모델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엔지니어) 채용공고는 전년 대비 40% 급증하며 전체 직종 중 최고 증가율을 기록했다. 2024년에도 78% 증가했던 점을 고려하면 2년 연속 폭발적 성장세다.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관련 직군도 강세다. 로봇공학 엔지니어 11%, 응용과학 연구원 11%, 데이터센터 엔지니어 9%가 각각 증가했다.
전체 채용시장이 8% 위축된 가운데, 직급별로는 극명한 차이가 나타났다. 디렉터(Director), 부사장(VP), C레벨 임원을 합친 고위 경영진 채용은 1.7%만 감소해 시장 평균을 6.3%포인트 웃돌았다. 중간관리자급은 5.7%, 일반 직원은 9% 줄었다.
성장률 상위 10대 직종 중 5개가 디렉터급 이상이었다. 데이터 엔지니어링 디렉터(+23%), 부동산 디렉터(+21%), 법무 디렉터(+21%),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디렉터(+14%), 엔지니어링 부사장(+12%) 등이다.
기업들이 전략적 리더십 인력에는 투자하지만, 운영 관리자와 실무 인력은 선별적으로만 채용하는 구조가 뚜렷해졌다. AI 코딩 도구로 고위 경영진이 엔지니어 팀 없이도 직접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실무자 의존도가 낮아진 영향도 있다.
"AI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대체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지만, 실제 데이터는 정반대였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채용은 지난해와 비교해 큰 변화가 없었다. 대부분의 엔지니어링 직종이 성장하거나 시장 평균 수준을 유지했다.
치우 CTO는 "AI 도구가 엔지니어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발자가 코파일럿을 사용하면 기능을 더 빠르게 구현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며, 반복적인 코드 작성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데이터 분석가 채용은 0.5% 증가했고, 데이터 관리 전문가는 1.1% 늘었다. AI가 없앨 거라 예상됐던 고객서비스 상담원 채용도 4.0%만 감소해 시장 평균을 웃돌았다.
스웨덴 핀테크 기업 클라르나(Klarna)는 고객서비스팀을 AI로 대체한다고 발표했다가 얼마 뒤 다시 사람을 채용했다. 챗봇이 단순 문의는 잘 처리하지만 판단이나 공감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우 CTO는 "AI가 실업률을 대규모로 급증시키지는 않고 있다"면서도 "AI의 영향은 선택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부 창작 작업은 큰 타격을 받는 반면, 공감·전략·복잡한 문제 해결이 필요한 역할은 견고하다"고 분석했다.
컴퓨터그래픽 아티스트, 작가, 사진작가는 장기적 감소 추세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그래픽 디자이너, 제품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수요가 크게 줄지 않았다.
창작 업무는 전략 기획과 단순 실행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경영 계층에서도 고위 임원 수요는 견고한 반면 일반 직원 채용은 부진한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다.

마케팅 직무는 전반적으로 시장 평균 수준을 유지했지만, 인플루언서 마케팅 전문가는 18.3% 증가하며 두드러진 성장을 보였다. 2024년 10% 증가에 이은 2년 연속 상승세다.
마케팅 전문가 마크 셰이퍼는 "기업과 광고에 대한 신뢰는 계속 하락하지만 친구와 가족에 대한 신뢰는 유지되고 있으며, 인플루언서가 신뢰할 수 있는 온라인 친구로 인식된다"고 설명했다.
검색 엔진과 소셜 네트워크가 외부로 보내는 트래픽을 대폭 축소하면서 디지털 마케팅 직무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직접적인 트래픽 유도 없이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밝은 영역이다.
이번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라지는 직무: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실행' 중심 업무 살아남는 직무: 전략·판단·공감이 필요한 '기획과 의사결정'
AI 시대 노동시장은 "AI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거나 "AI를 도구로 활용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일"로 양분되고 있다. AI 노출도가 높은 직업 안에서도 AI를 적극 활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생산성과 소득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