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 무렵, 그러니까 약 30년 전부터 새치가 올라왔다. 어린 마음에 창피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을 하며 염색을 하다 보니 창피함은 사라졌지만, 이젠 '귀찮음'이 새로 생겼다. 30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자에게 염색은 여전히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 몇 달 전 우연히 알게 된 염색 샴푸에 기대가 한껏 부풀었으나, 이내 검게 물든 손톱을 보고 탄식하며 깊이 실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 5개월 만에 320억, 6개월 만에 150만개
2021년 8월 초 한 염색 샴푸가 시장에 등장했다. 출시 5개월 만에 매출 320억원, 수익 130억원을 기록했다. 6개월 만에 판매량 150만개를 돌파했다. 롯데홈쇼핑에서는 5분 만에 20억원어치가 팔렸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엔 광고가 넘쳐났다. "감기만 하면 흰머리가 사라진다", "천연 성분이라 안전". 소비자 조사에서 염색샴푸를 처음 알게 된 경로는 TV광고 34.1%, 지인 추천 20.6%, 포털 검색 19.5%, SNS 광고 10.8% 순이었다. 구매 동기는 간편한 셀프 염색 방법을 찾다가가 61%로 과반을 차지했다.
하지만 시장이 커질수록 이상한 신호들이 나타났다. 전국소비자상담센터에 염색샴푸 관련 상담이 꾸준히 늘었다. 미래소비자행동이 2023년 4월 사용자 1000명을 조사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68.3%가 부작용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머릿결이 거칠어짐 29.9%, 염색이 안 됨 23.1%, 손톱이 검게 물듦 14%, 머리카락이 빠짐 11.3%, 눈이 아프거나 시야가 흐려짐 10.8%, 얼굴이나 몸에 두드러기 5.3%. 머리카락 관련 증상만 51.4%에 달했다.
그런데 부작용을 겪은 사람 중 48.2%는 아무 조치도 안 했다. 37.9%는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해 끝까지 썼다. 반품·환불을 시도한 건 6.6%에 불과했고, 4.4%는 업체가 거절했다. 미래소비자행동은 아예 피해신고센터를 만들었다. 실제 상담 중엔 머리가 한꺼번에 빠지거나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긴 경우도 있었다.
■ 1,2,4-THB, 최대 3% 함유…박테리아 실험서 '양성'
문제의 핵심은 1,2,4-트리하이드록시벤젠, 줄여서 'THB'라는 성분이었다. 옅은 베이지색 가루로 물에 잘 녹고 공기 중 산소와 반응해 검은색 물질을 만든다. 2019년 유럽 소비자안전성과학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화장품에서 THB는 산화제 없이 영구염모제에 최대 3%, 모발 염색샴푸엔 최대 0.7%까지 사용됐다.
식약처가 유전독성 시험 자료를 검토한 결과가 나왔다. 박테리아를 이용한 복귀돌연변이 시험에서 명확한 양성 반응이 나타났다. 사람 유래 세포 실험에서도 DNA 손상 및 염색체 이상이 확인됐다.
2019년 유럽 소비자안전성과학위원회는 THB에 대해 피부감작성 우려와 유전독성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염모제로 사용하기에 안전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2020년 12월 유럽에서 화장품 사용이 금지됐다.
식약처도 2022년 1월 사용 금지를 추진했다. 업체는 반발했다. "두피에 바르는 염색약이 아니라 씻어내는 샴푸인데 똑같이 취급할 순 없다"는 논리였다. 2023년 3월 국무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가 추가 검증을 권고했다.
■ 사과 갈변 원리, 머리카락에 적용하다
출발은 2007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한 편의 논문이었다. KAIST 이해신 교수가 바닷가 바위에 붙어 있는 홍합의 접착력 비밀을 밝혀낸 연구였다. 폴리페놀이라는 물질 덕분이었다. 그가 다음 타깃으로 삼은 건 머리카락이었다.
"사과 껍질 벗겨 놓으면 갈색으로 변하잖아요. 그 원리를 머리카락에 적용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폴리페놀이 산소와 만나 갈색으로 변하는 갈변 현상을 이용한 염색 샴푸였다.
갈변의 과정은 이렇다. 폴리페놀산화효소라는 효소가 카테콜 같은 페놀성 화합물을 공기 중 산소로 산화시켜 퀴논을 만든다. 이 퀴논이 계속 산화되고 중합·축합되면 멜라닌 색소나 이와 유사한 갈색, 검은색 색소가 형성된다. 사과나 바나나에서 일어나는 그 반응을 머리카락에서 일으키는 것이다.
기술은 민간 기업으로 넘어갔고 수백억원 매출을 올리는 히트 상품이 됐다. 2022년 상반기엔 매출 600억원 중 해외 매출이 47%인 280억원에 달했다.
■ 중앙대병원 실험실에서 확인된 차이
중앙대병원 피부과 김범준·석준 교수팀이 2023년 갈변 방식과 코팅 방식 염색샴푸를 비교한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Skin Research and Technology'에 발표했다. 각각 10회 사용한 뒤 모발의 밝기, 색상 유지력, 강도, 부드러움, 탄력성, 윤기, 수분 함량, 단백질 함량, 모발 구조를 측정했다.
코팅 방식이 갈변 방식보다 더 어둡게 염색됐고 모발 큐티클 간 들뜨는 현상이 줄었다. 모발 거칠기가 개선된 것이다. 모발 인장 강도, 윤기, 탄력성은 두 방식 모두 비슷했다.
반면 갈변 방식은 하이드록시 라디칼을 증가시켰다. 자외선, 미세먼지 등으로 발생하는 활성산소종이다. 피부 세포와 조직을 손상시킬 수 있다. 갈변 방식은 색 유지 기간이 길지만 큐티클 방어층 손상 가능성이 있는 지표가 일부 증가했다.
■ 3년 검증 끝 2024년 10월 판매 금지
식약처는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를 중심으로 재검증에 들어갔다. 결과는 2024년 2월 나왔다. 식약처는 비임상 유전독성 시험 자료를 검토한 뒤 THB를 세포 유전물질에 변이를 일으키는 등 잠재적인 유전독성을 배제할 수 없는 물질로 평가했다. 피부감작성, 피부자극성, 급성독성, 반복투여독성, 생식발생독성, 피부흡수 시험 결과에서도 문제가 나왔다. THB는 피부감작성 및 약한 피부자극성 물질로 평가됐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도 "THB에 대해 유전독성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THB는 유전독성 가능성으로 역치가 존재하지 않아 독성기준값을 결정할 수 없다. 소비자가 지속적으로 사용할 경우 안전이 우려된다. 예방적 차원에서 화장품 원료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2024년 10월 2일부터 THB가 든 제품은 판매가 전면 금지됐다.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이다. 10여 곳의 관련 기업은 해당 성분을 적용한 제품을 모두 단종시켰다.
■ 법원은 "과대광고 아니다" 했지만
법적 다툼도 있었다. 서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처가 2021년 11월 한 염색샴푸 제품에 광고업무정지 4개월을 때렸다. 업체는 법원에 집행정지 신청을 냈고, 2021년 12월 서울고등법원은 집행정지를 인용했다. 식약처가 항고했지만 2022년 1월 법원은 항고를 기각했다. "과대광고가 아니다"는 판단이었다.
분당서울대병원 허창훈 피부과 교수는 논문을 통해 본질을 짚었다. "1,2,3-THB는 독성시험을 거쳐 식약처로부터 염모제로 허가받았다. 염모제에만 2% 이하 농도로 사용하도록 허가돼 있고 일반화장품에는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1,2,4-THB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염모성분으로 등재조차 안 됐다. 인체 적용 제품은 반드시 안전성이 담보돼야 한다."
■ 위기 넘고 재기 노리는 기업들
모다모다는 위기를 맞았다. THB 성분 논란으로 매출이 급락했다. 100억원짜리 사옥을 매각해 자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식약처를 찾아갔다. 안전 가이드라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문을 구했다. 결국 안전 검증 기관과 연구소에서 유전독성 테스트를 통과한 3세대 제품을 최근 내놨다. THB 성분을 뺀 제품이다.
이해신 교수는 논란이 됐던 기업과 갈라섰다. 폴리페놀팩토리라는 새 회사를 만들어 탈모 샴푸 '그래비티'를 개발했다. 2024년 4월 출시된 이 제품은 폴리페놀의 접착력을 활용해 모근을 코팅하는 방식이다. 임상시험에서 2주 만에 탈모가 70% 감소했다는 데이터를 제시했다. 보통 탈모 샴푸가 6주 사용 후 70% 감소를 목표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빠른 효과다.
■ 단기 실험으론 알 수 없는 것들
분당서울대병원 허창훈 교수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화장품에 의한 알레르기성 피부염은 한두 번의 도포로 발생하는 게 아니다. 오랜 기간 조금씩 축적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 단기간 도포시험으로 부작용이 없다고 단언해선 안 된다."
식약처는 THB 외에도 1차 위해평가에서 o-아미노페놀, 염산 m-페닐렌디아민, m-페닐렌디아민, 카테콜, 피로갈롤 5가지 물질에 대해 유전 독성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 성분들이 들어간 샴푸가 3601개였다. 2차 위해성 평가에선 2-아미노-5-니트로페놀, 황산 m-페닐렌디아민 등 6개 성분이 추가됐다. 국내 유통 중인 3000개 이상 샴푸를 조사 중이다.
유튜브 광고는 여전히 소비자를 유혹한다. 감기만 하면 염색된다는 편리함. 하지만 그 편리함 뒤에 가려진 건 3년간의 검증 끝에 유전독성 가능성이 확인됐다는 결과다. 과학적 아이디어와 상업적 성공, 그리고 안전성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