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년이었다. 구글의 30번째 직원이자 검색엔진의 핵심 인프라를 설계한 전설적 엔지니어 제프 딘(Jeff Dean)이 2026년 8월 5일 퇴사를 선언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었다. 구글 브레인 창립 멤버인 쿼크 레(Quoc Le), 딥마인드 수석 연구 과학자 오리올 빈얄스(Oriol Vinyals), 시니어 펠로우 산제이 게마와트(Sanjay Ghemawat) 등 구글 AI 연구의 핵심 인력 4명이 한꺼번에 회사를 떠났다. 이들이 향한 곳은 또 다른 대기업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차린 스타트업 '디스커버리 루프(Discovery Loop)'였다.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은 올해 들어 AI 투자 우려와 실적 불안으로 여러 차례 주가 급락을 겪었다. 7월 23일에는 실적 발표 후 주가가 7.13% 폭락하며 투자자들의 신뢰가 흔들렸다. 제프 딘을 비롯한 핵심 연구진의 동반 퇴사는 구글 AI 조직의 리더십 공백을 더욱 부각시켰다.
■ 월급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같은 현상은 빅테크 업계에서 벌어지는 더 큰 흐름의 상징이다. 메타의 전 AI 수석 과학자 얀 르쿤(Yann LeCun)은 2026년 1월 'AMI랩스(Advanced Machine Intelligence Labs)'를 설립했고, 두 달 뒤인 3월 10일 10억 3천만 달러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다. 기업 가치는 35억 달러로 평가됐다. 오픈AI 전 CTO 미라 무라티는 '싱킹 머신즈 랩(Thinking Machines Lab)'을 차려 20억 달러를 확보했고, 오픈AI 공동창업자 일리야 수츠케베르의 '세이프 슈퍼인텔리전스'는 엔비디아로부터만 50억 달러 투자를 받았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떠난 이유가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해외 빅테크와 국내 대기업 간 AI 인력 보상 격차는 5~6배에 달한다. IT업계 한 관계자는 "케이스마다 다르지만 국내와 해외에서 AI 인력이 받는 연봉이 5~6배 이상 차이 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현장 인재들이 꼽는 퇴사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국내 AI 직무자와 기업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71%가 'AI 전략 부재'를 회사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경영진 이해도 부족이 58%, 개념검증(PoC) 반복이 43%로 뒤를 이었다. 급여 수준은 44%로 3위에 그쳤다.
4대 대기업 중 한 곳에서 인공지능(AI) 기획 직무를 맡아 일하던 30대 직장인 A씨는 올해 초 한 AI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그는 "대기업은 기존에 먹고살던 방식이 있다 보니 이를 탈피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며 "AI 직무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움직이는 AI 네이티브 기업에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대기업에 입사한 AI 인력들이 가장 실망하는 순간은 '보고서만 쓰게 될 때'다. AI 하겠다고 입사했는데 막상 실무는 기획서 작성과 내부 보고에 치중된다는 것이다. 한 AI 연구원은 "기술 개발보다는 경영진 설득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된다"고 토로했다.
■ 스타트업으로 몰리는 자본, 그 이유는
빅테크 출신 연구자들이 창업한 스타트업에는 천문학적 투자금이 쏟아지고 있다. 2026년 초반 글로벌 투자액의 48%인 2,260억 달러가 AI 스타트업에 집중됐다. 이 중 오픈AI와 앤트로픽 같은 소수 LLM 기업이 전체 AI 투자액의 40%를 독식했다.

투자자들이 이들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기존 거대언어모델(LLM)이 가진 현실 세계 이해 및 장기 계획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 때문이다. 얀 르쿤은 "AI가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 행동을 계획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프 딘 역시 "AI가 인간의 개입 없이 실험 루프를 완전히 자동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며 "이를 통해 과학적 돌파구와 발전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단순히 기존 AI를 개선하는 게 아니라, AI가 스스로를 개선하는 '재귀적 자기개선(recursive self-improvement)' 시스템을 구축하려 한다. 이 기술이 완성되면 신약 개발, 신소재 발견, 컴퓨터 하드웨어 설계 등 과학 연구 전반의 속도가 극적으로 빨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흐름은 한국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2020년 10월 네이버 클로바 AI 총괄을 이끌던 김성훈 대표는 네이버를 떠나 '업스테이지(Upstage)'를 창업했다. 그와 함께 네이버 클로바 OCR 리더 이활석 박사, 파파고 모델팀 리더 박은정, 엔비디아 AI 교육·마케팅 리더 손해인 등 국내 AI 업계의 스타급 인재 7명이 한 번에 모였다. 카카오 AI 팀장 김재범, 네이버 AI 연구소장 하정우 등도 자문으로 합류했다.
김성훈 대표는 창업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일부가 독점하는 AI가 아닌 더 많은 분들이 AI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모두의 AI 트랜스포메이션 시대를 열어 보기 위해 창업했다." 업스테이지는 이후 카카오톡에 챗GPT를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며 대기업 네이버를 상대로 기술 경쟁력을 입증했다.
한국의 AI 인재 유출 현상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미국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연구소(HAI)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AI 인재 순이동 지수는 2023년 -0.30에서 2024년 -0.36으로 유출 폭이 확대됐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의 '2026 스탠포드 AI INDEX로 살펴본 우리나라 AI 현황 분석'에서도 2025년까지 4년 연속 한국의 AI 인재 순유출이 확인됐다.
세계은행의 최근 보고서는 더 충격적이다. 2011년 12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13년간 한국에서 해외로 순유출된 최상위 AI 연구자·발명자가 월평균 11명으로 추정된다. 총 1,716명이 한국을 떠난 셈이다. 한국은 세계은행이 비교한 21개국 가운데 인도(월평균 200명), 브라질(19명), 이탈리아(17명), 프랑스(12명)에 이어 다섯 번째로 AI 인재 순유출 규모가 큰 국가였다.
■ 관료주의와 속도의 차이
빅테크 출신 연구자들이 스타트업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율성'과 '속도'다. 대기업은 수많은 승인 절차와 의사결정 단계를 거쳐야 한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내부 정치와 기존 사업부와의 이해관계 조정 과정에서 속도가 느려진다.
반면 스타트업은 아이디어를 즉시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실패하더라도 빠르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다. 한 AI 연구자는 "대기업에서는 3개월이 걸릴 결정을 스타트업에서는 3일 만에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2026년 초반 국내 벤처 투자 시장도 이런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투자 건수는 감소하거나 유지되지만, 투자 금액은 크게 증가하는 '대규모 라운드 중심의 자금 쏠림' 현상이 나타났다. 1~2월에 100억 원 이상 투자를 유치한 기업의 75% 이상이 AI, 바이오, 콘텐츠, 방산, 에너지, 첨단 제조 등 6대 전략산업에 속한 딥테크 기업이었다.
특히 올해는 '피지컬 AI(Physical AI)'가 투자 시장을 견인하는 핵심 테마로 떠올랐다. 센서로 물리적 환경을 인식하고 로봇이나 기계를 통해 직접 상호작용하는 기술로, 모빌리티와 드론, 로보틱스 산업에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 AI 인프라 기업 클러쉬가 380억 원, 에이더엑스가 100억 원, 반도체·양자 인프라 기업 에스디티가 300억 원을 유치하는 등 대형 투자가 줄을 이었다.
■ 결국 남는 건 속도와 자유
빅테크에서 스타트업으로 향하는 인재들의 선택은 단순한 이직이 아니다. 그들은 안정된 급여와 복지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이 믿는 기술 비전을 직접 실현하려 한다. 제프 딘은 27년간 구글에서 쌓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김성훈 대표는 네이버라는 안정된 조직을 떠나 스타트업 생태계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선택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혁신은 더 이상 거대 조직의 전유물이 아니다. 빠르게 움직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이디어를 즉시 실행할 수 있는 곳에서 진짜 혁신이 일어난다. 대기업들이 AI 전략 부재와 경영진 이해도 부족, 느린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한, 최고의 인재들은 계속해서 스타트업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차세대 AI의 미래가 만들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