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킹이나 피싱으로 디지털 지갑에 침투하던 가상자산 범죄가 보유자를 현실에서 직접 위협하는 방식으로 번지고 있다. 범죄자들은 가상자산 보유자의 주소와 자산 정보 등을 확보한 뒤 주거지에 침입하거나 본인과 가족을 납치해 송금을 강요하고 있다.
블록체인 데이터 플랫폼 체이널리시스는 7일 공개한 ‘폭력형 가상자산 범죄(Violence Against Crypto Owners)’ 리포트에서 가상자산 보유자를 대상으로 한 물리적 공격이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산을 탈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유자의 신체와 일상을 직접 겨냥하는 범죄로 양상이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다.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2026년 상반기 전 세계에서 이른바 ‘렌치 공격’을 통해 실제로 탈취된 가상자산은 3000만달러, 한화 약 420억원을 넘어섰다. 현재 추세가 이어지면 올해 피해액은 2025년 기록한 5800만달러를 넘어 역대 최대치를 경신할 가능성이 있다. 해당 집계는 탈취에 성공한 사건만 반영한 것으로, 송금 시도 단계에서 차단됐거나 몸값을 요구한 사건, 자금이 동결된 사례까지 합치면 범죄 규모는 더 클 수 있다.
온라인 정보 유출이 현실의 범죄 표적으로
물리적 공격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개인정보 유출이 지목됐다. 가상자산 보유 규모뿐 아니라 이름과 주소, 가족관계 같은 정보가 함께 노출되면 온라인에서 유통된 데이터가 실제 범행 대상을 선정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2024년 세무당국 공무원이 고액 가상자산 보유자의 이름과 주소, 자산 규모, 세금 정보 등이 담긴 자료를 탈취해 판매한 혐의를 받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현지에서 가상자산 보유자를 겨냥한 폭력 사건이 늘었으며, 2026년 상반기에 공개된 사례만 30건에 달했다.
프랑스 내무부도 위험도가 높은 가상자산 보유자를 위한 신속 경보와 보호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디지털 자산 정보의 유출이 사생활 침해를 넘어 납치와 협박, 주거침입 같은 강력범죄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다.
본인 피해 넘어 가족·지인까지 공격 대상 확대
범죄자들이 노리는 대상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가상자산을 보유한 당사자를 직접 공격하는 사례가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가족이나 지인을 붙잡고 자산 이전을 요구하는 방식이 늘고 있다.
2026년 1월 기준 가족과 지인을 대상으로 한 사건은 전체 폭력형 가상자산 범죄의 약 25~30%를 차지했다. 프랑스에서는 이 비중이 40%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범행 장소로 주거지를 택하는 사례도 빠르게 증가했다. 전체 공격에서 주거침입이 차지하는 비율은 2025년 14%에서 2026년 상반기 37%로 23%포인트 높아졌다. 가상자산을 개인이 직접 보관하고 관리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범죄자가 보유자의 위치와 생활 정보를 파악하면 물리적 압박을 통해 지갑 접근 권한이나 송금을 요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블록체인 흔적, 강력범죄 수사의 단서로
폭력 범죄가 오프라인에서 발생하더라도 피해 자산이 블록체인을 통해 이동하면 온체인 기록이 남는다. 체이널리시스는 탈취된 가상자산의 이동 경로를 분석해 공격자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범행 수법과 조직범죄 연계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사기관은 지갑 간 자금 이동과 거래소 유입 여부 등을 전통적인 수사 정보와 결합해 범죄자와 자금 세탁망을 추적할 수 있다. 개인정보 유출 경로, 납치·협박 과정에 대한 수사와 블록체인 분석을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권준혁 체이널리시스코리아 지사장은 “이번 분석은 가상자산 보유자를 노린 범죄가 더 이상 온라인 환경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세계의 안전 문제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개인정보 유출과 물리적 범죄가 결합되는 만큼 온체인 분석과 전통적인 수사 기법을 함께 활용하는 접근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체이널리시스는 객관적인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을 바탕으로 수사기관이 자금 흐름과 조직범죄 연계 여부를 보다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