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로 브랜딩을 한다고?

포스터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1990년대 불조심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성행했어요. 그 시절 초등학교에서는 화재 예방 포스터를 그리는 게 연례행사였죠. 보통 4절지 도화지 한가운데 불을 큼지막하게 그리고, '자나 깨나 불조심!'이나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따위의 문구를 쓰는 식이었요.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고딕체로요. 이런 불조심 포스터 공모전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화재보험협회에 따르면, 1975년 내무부와 화재보험협회가 공동으로 화재예방 포스터 대회를 처음 열었어요.

포스터, 독재 정권과 전시 선전의 산물


이처럼 한국에서 포스터는 1960년~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어요. 당시 정권이 정책 선전 매체로 적극적으로 활용했죠. 반공 사상 선전은 물론이고,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할 때에도 포스터를 사용했어요. 화재예방 포스터 대회도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여요.

미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만든 모병 포스터 '엉클 샘'이 유명하죠. 포스터 전면에 등장한 엉클 샘이 "I WANT YOU FOR US ARMY"라고 말하듯이 음성 지원되는 포스터예요. 실제 엉클 샘 포스터는 미군 모병에 도움을 많이 줬다고 해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포스터 덕을 톡톡히 본 미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여성의 경제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리벳공 로지를 등장시킨 "WE CAN DO IT" 포스터를 만들었죠. 당시 미국은 남성들이 전쟁터로 나가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여성의 경제활동을 장려하는 캠페인을 벌였고, 캠페인의 일환으로 리벳공 로지 포스터를 만든 거죠.

21세기 포스터의 반전


20세기 독재정권과 전쟁의 산물이었던 포스터가 브랜딩의 훌륭한 매체로 변신했어요. 그야말로 포스터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오래되어 진부하다고 여겨진 포스터를 재활용한 주인공은 우아한형제들과 모베러웍스에요. 둘은 포스터의 본질만 남기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포스터를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포스터의 본질을 간직한 채, 선전이 아닌 설득 매체로 포스터를 쓴 거죠.

포스터 맛집 '우아한형제들'


먼저 우아한형제들의 포스터를 살펴볼까요. 우아한형제들은 포스터 맛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회사의 비전과 가치를 전파하는 내부 브랜딩의 일환으로 포스터를 만든 것으로 유명해요. 즉, 직원들이 브랜드 정체성인 배민다움을 내재화하고 체화하게 하기 위해 포스터를 만들어 곳곳에 붙여 놓은 거죠. 겉으로 고객들에게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만 배민스러움을 표방하기 전에 직원들로부터 스며 나와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통 기업들과는 많이 다르죠. 일반적으로 기업의 비전과 가치 등을 주입(?)하기 위해 워크숍을 열거나 강당에 모여 교육을 듣잖아요. 하지만 오프라인 워크숍이나 교육에 참석하려면 일부러 시간을 할애해야 하죠. 온라인 강의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온라인으로 강의를 듣더라도 실제로는 컴퓨터 화면에 창만 열어놓은 채 다른 업무를 하기 일쑤니까요. 이러니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포스터를 통한 내부 브랜딩은 일부러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되고,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아요. 특히 구성원들이 브랜드를 체화하려면 오랜 시간 동안 브랜드의 메시지를 자주 보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잖아요. 이런 측면에서 우아한형제들의 사옥 곳곳에 부착된 포스터는 공기나 물과 같은 역할을 해요. 실제 김봉진 의장은 <배민다움>에서 브랜드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회사의 브랜드 정체성은 공기나 물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 회사를 지배하는 거죠. 브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이버는 네이버다워야 하고 애플은 애플다워야 하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그걸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배민다움> 172쪽 중에서

송파구에서 일을 더 잘하는 11가지 방법


우아한형제들의 포스터 끝판왕은 ‘송파구에서 일을 더 잘하는 11가지 방법’, 일명 ‘송파 11조’라고 생각해요. 우아한형제들이 조직문화 실천 방법을 11가지로 정리해 포스터로 만든 건데요. 구성원들이 추구해야 하는 일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그 의미를 설명한 거예요.

전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인상을 받았어요.

첫째, 네이밍이에요. ‘송파 11조’가 아니라 ‘우아한형제들이 지켜야 할 11가지 조직문화’였으면 어땠을까요. 일단 거부감이 들었을 거 같아요. 강제하거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죠. 게다가 지켜야 할 게 11개나 된다면 한숨부터 나올 거 같아요. 또 조직문화를 제목에 드러내는 건 너무 노골적이고 적나라하잖아요. 이에 반해 ‘송파구에서 일을 더 잘하는 11가지 방법’은 어떤가요. 강요하지도 노골적이지도 않아요. 오히려 '일잘러'가 되기 위한 팁을 알려준다니 감사할 따름이죠. 다 읽고 나서 열두 번째, 열세 번째 방법을 더 알려 달라고 하지 않을까요. 둘의 차이는 관점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회사 입장이 아닌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접근한 게 주효했던 것이죠.

둘째,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에요. 뭐든 외우려면 습관적으로 봐야 하잖아요. 우리가 어릴 때 구구단이나 원소주기율표를 어떻게 암기했죠. 벽에 포스터를 붙여 놓고 아침 먹기 전에 한 번 보고, 학교 갔다 와서 또 보고, 끝으로 자기 전에 또 한 번 봤잖아요. 이런 식으로 뭔가를 체화하려면 자주 보는 게 답이죠. ‘송파 11조’가 그렇습니다. 덧붙이면 포스터여서 대외적으로 퍼지기에도 좋아요. 실제 구글에서 검색을 하면 포스터를 찍은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심지어 우아한형제들 홈페이지에서는 JPG나 PDF 파일로 한영 버전을 내려받을 수 있어요. 우아한형제들 구성원이 아니어도, 송파 11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SNS를 통해 공유할 수도 있겠죠. 내부 구성원을 대상으로 만든 조직문화 실천 방법이 회사를 저절로 홍보해 주는 것이죠.

셋째, 납득할만한 이유에요. 학창 시절 수학은 암기과목이라고 한 선생님이 있었어요. 원리를 모른 채 그냥 외우기만 했던 공식은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까먹었죠. 대부분의 기업 비전과 핵심 가치도 마찬가지예요. 선언만 있지 이유가 없어요. 그걸 제정한 이들만 아는 그들만의 비전과 가치인 거죠. 다시 말해, 구성원들이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선언은 아무리 좋은 말이어도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이에요. 반면에 송파 11조는 일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그 의미를 설명했어요. 이를테면 ‘이끌거나 따르거나 떠나거나’라고 외치고, 일의 성공을 위해서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팔로워십도 중요하다고 부연하는 식이죠.

모베러웍스, "티셔츠가 현시대의 포스터"

모베러웍스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브랜드예요. 회사를 나온 세 명의 창업자가 프리 워커스(free workers)라는 콘셉트로 브랜드를 만들었어요. 프리 워커스가 회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노동자이니까, 결국 자신들의 이야기인 셈이죠. 모베러웍스도 '더 나은 일(more better works)'이라는 뜻이에요. 일에 진심이라는 게 느껴지죠.

모베러웍스는 일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포스터에 주목했어요. 우아한형제들처럼 포스터를 만드는 건 같지만 조금 결이 달라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살펴볼게요.

첫째, 포스터의 소재예요. 모베러웍스는 티셔츠를 포스터로 해석했어요. 오래전부터 포스터라고 하면 종이를 생각했을 텐데,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거죠. 모베러웍스는 티셔츠가 현시대의 포스터라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티셔츠 앞면에 메시지를 인쇄해 팔기 시작했죠. 종이에서 티셔츠로 바뀌었을 뿐, 사람들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포스터의 본질은 그대로인 거죠.

둘째, 메시지 발신자예요. 모베러웍스의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메시지의 발신자예요. ASAP(As Slow As Possible, 가능한 천천히)나 Small Work Big Money(적게 일하고 많이 벌자) 등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체인 셈이죠. 소비자는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메시지가 인쇄된 티셔츠를 사 입고, 지인이나 회사 동료, 일로 만난 사람들과 티셔츠에 인쇄된 메시지를 소재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 이렇게 소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죠.

모베러웍스는 처음에는 포스터로써의 티셔츠를 만들었어요. 하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포스터의 본질에 부합하면 티셔츠만을 고집하진 않아요. 일하는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메시지를 티셔츠에만 인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은 가방, 모자, 머그잔, 텀블러 등에도 메시지를 인쇄해 팔고, 때로는 맥주나 누룽지를 만들기도 했어요. 메시지를 담는 그릇은 무한히 변주될 수 있으니까요.

*이 글은 아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이 글의 원본은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김민호

hacademicv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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